"넘치게 가득 찬 교실의 비참한 빈민들 냄새 한가운데서 그의 목덜미로부터 풍겨오는 감미롭고 신선한 비누 냄새 맡기를 내가 얼마나 좋아했던가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지금 읽고 있는 <데미안> 중에서 주인공 싱클레어가 '데미안'을 회상하는 부분 중 일부를 발췌해 보았습니다.
여러분은 처음 보는 사람에게, 혹은 과거의 사람에게 호감을 느꼈을 때는자신의 어떤 감각과 자극을 이용해 그 사람을 기억하고 좋은 이미지와 연관을 시켰나요? 물론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면서 바로 즉각적인 신호를 뇌에 보내는 감각은 '시각'이겠지요. 아무래도 외모에서 받는 첫인상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왠지 빈약하고 부족합니다. 저의 과거를 회상해 보니 저는 후각에서도, 청각에서도, 촉각에서도 느꼈으니 시각과 더불어 다섯 가지 감각 중에서 네 가지 감각을 다 이용하여 사람을 만나고 기억하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선 위의 <데미안> 글귀로 시작을 했으니 '후각'에 관해 이야기를 해 볼까요?
저도 오직 '향기'만으로 그 사람을 기억하고 매력을 느꼈던 과거가 떠올랐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는 저보다 1살 어린 후배였는데 농구를 하겠다고 저에게 윗옷을 잠시 맡긴 일이 있었습니다. 난방에서 풍기는 섬유유연제 냄새와 함께 살짝 묻어 나오는 그 아이만의 향기가 은은하게 배어 나오더군요. 들키면 안 되니 그 친구가 운동할 때 아주 잠깐 코에 대고 맡았었는데 그 향기가 그렇게 강하게 각인되고 오래 기억될 줄은 몰랐습니다.
향기에 관해서라면 '향수'를 빼고 논할 수 없겠지요. 저도, 저의 남편도 아이들을 떼어놓고 데이트를 하러 나갈 때는 꼭 향수를 뿌립니다. 향수 특유의 매력이 있어요. 사람을 돋보이게 하고 그 사람의 좋은 이미지에 뭔가 강한 이미지를 덧씌워주지요. 내가 지켜보고 있던 사람에게서 매번 그 향기가 난다면, 내가 만나는 사람에게서 매번 그 향기를 맡을 수 있다는 것은, 안정감을 주면서 그 사람 고유의 정체성을 결정짓는 또 하나의 요인이 되어줍니다. 그래서 아들 셋이 성인이 되면 데이트할 때 꼭 향수를 뿌리라고 선물을 해 주고 싶습니다. 저희 집에 여자가 저 하나이니 데이트 코칭을 잘해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음은 '청각'입니다.
청각 하면 바로 '목소리'지요. 사람마다 자기를 결정짓는 고유한 목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귀로 듣는 목소리는 목구멍에서 나오는 신체적인 구조의 소리의 흐름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성격과 성품을 비춰주는 '어조'라는 것이 같이 곁들여지게 됩니다. 아무리 목소리가 좋아도 말이 거칠고, 내뱉어지는 단어의 선택에 품격이 담기지 않는다면 우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게 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목소리는 평범하지만 낮은 저음의 조곤조곤한 어투와 배려심이 담긴 소리라면, 첫 대면에서도 그 '목소리' 하나만으로 상대방에게 충분한 매력을 어필할 수도 있는 것이지요.
저는 '목소리' 하나만으로 어떤 사람에게 매력을 듬뿍 느꼈던 적이 있습니다. 바로 결혼 전의 합창단에서요. 제가 앞줄에서 '소프라노'를 하고 있는데 상대방은 뒤에서 '바리톤'을 하고 있었습니다. 바리톤은 테너의 높은 음역과 베이스의 낮은 음역의 중간으로, 완충제 역할을 하듯 합창에서 중간 음역대를 탄탄하게 받쳐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제 귀 뒤쪽에서 들려오는 그 '음색'이 너무 좋은 거예요. 사람은, 아니 저는 아주 가끔씩 상상의 세계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목소리와 반주가 어울린다면, 하필 그때 선곡된 노래가 나의 감성에 딱 들어맞는 것이었다면, 그 순간은 어떤 다른 때보다 감동적이고 신비로운 감정을 저에게 선사해 주는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곡을 반복해서 듣는다는 것은, 가사와 멜로디, 반주와 분위기가 큰 몫을 할 수도 있지만 결정적으로 그 가수의 음색이 마음에 드는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도입의 살며시 대화하는 부분이든, 클라이맥스에서 온 마음을 다해 쏟아내는 격정적인 부분이든, 작으면 작은 대로, 크면 큰 대로, 그 목소리는 자신의 그 어떤 심상을 건드리는 울림이 있었을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멀리서, 대단하게 찾을 것도 아닙니다. 곁에서 들려오는 나직한 목소리의 사랑스러운 존재가 우리 각자가 될 수도 있으니까요.
다음은 촉각입니다.
촉각은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처음으로 잡아보는 손에서 첫 입맞춤.. 사랑의 나눔까지.. 은밀하게, 비밀스러운 영역이라 이제 금방 브런치 작가가 된 저는 이 부분은 솔직히 말해 어떻게 써야 할지, 뭘 써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손 잡는 것처럼 가장 기초적이고 간단한 스킨십이었다 하더라도 사람마다 그 과정과 여운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쩌면 둘 사이의 마음과 마음사이의 거리에 따라 다를 수도 있고, 이성을 대하는 마음가짐에 따라 다를 수도 있고, 이 스킨십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그 관점에 따라 다를 수도 있겠지요.
아, 그리고 그 스킨십의 기술에 따라 다를 수도 있습니다.
촉각은 가장 큰 기억과 감정을 남길 수 있는 부분이기에 어쩌면 가장 달콤할 수도, 황홀할 수도 있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가장 아쉽고 씁쓸한 기억을 남길 수도 있는 부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시각하면 어떤 것이 떠오를까요?
다정하고 따뜻하게 바라보는 눈빛, 꾸밈없이 환화게 웃는 얼굴, 행동 하나하나에도 섬세함과 배려심이 돋보였던 순간들, 내가 못하고 실수해도 웃고 핀잔을 주기보다는 민망해 할까봐 괜찮다고 웃어주던 미소, 가끔은 혼자서만 고민하며 보여주고 싶어하지 않았던 쓸쓸한 어깨... 각자가 마음속에 기억하고 있는 그 사람만의 모습이 있겠지요?
오늘 저의 글을 읽으니.. 후각으로, 청각으로, 시각으로 촉각으로 기억하고 있는 옛 기억 너머의 그분이 생각나나요? 열대야의 조여 오는 더위도 없고, 날이 선 매서운 바람소리의 겨울이 아니기에, 당분간 이 계절 앞에서는 잠시나마 추억에 잠겨보는 것도 좋을 듯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