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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임자 Jul 14. 2023

쉿!

낮말은 새가 듣고, 노출된 이름은 나쁜 사람들이 눈여겨 본다.

2023. 7. 13.

< 사진 임자 = 글임자 >

"엄마. 드디어 나도 검은띠야! 여기 내 이름도 있어"

"세상에 만상에! 축하해 우리 아들. 생각보다 빨리 나왔네."

"이제 내일부턴 이거하고 갈 거야!"

"그래. 정말 좋겠다. 역시 노력한 보람이 있네."

 새까만 바탕에 노란색으로 선명히도 박힌 아들 이름이 자랑스럽게 빛났다.


지난번에 합기도 심사를 보고 와서 이제나 저제나 검은 띠가 도착할까 애타게 기다리던 남매가 있었다.

1년 동안 합기도 학원을 다닌 쾌거다.

"엄마, 우리도 곧 검은띠 딸 수 있어. 빨리 따고 싶다."

같은 합기도 학원에 다니는 또래 중에 아들과 딸만 빼고 모두 검은띠라고 했다.

"시간이 지나면 다 따겠지. 우선 천천히 배우고 열심히 해서 따 봐, 얘들아."

"빨리 심사 봤으면 좋겠어."

아이들은 학교 다니는 일보다도 합기도 학원 다니는 일에 더 심혈을 기울인 듯 보였고 종종 학교에서 하는 과목별 단원평가나 수행평가를 비롯한 각종 평가에는 시큰둥해도 합기도 학원에서 심사가 있다고 하면 당장 승급 심사비를 내 달라며 성화였다.

아무리 봐도 그냥 심사비만 내면 누구나 공평하게 통과시켜 주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아이들은 띠 색깔이 바뀔 때마다 호들갑스럽게, 그리고 자랑스럽게 우리에게 그것들을 선보였다.

물론 나도 뿌듯하긴 하다.


"엄마, 봐봐! 어때?"

"우리 아들, 진짜 멋진데! 검은띠 1단이네 이제."

"응. 2단도 따고 3단도 딸 거야."

그런데 남편과 나는 이제 다른 운동을 한 번 권해볼까 생각 중이라는 걸 꿈에도 모르고 아들은 아예 합기도 도장까지 차릴 기세였다.

아들은 야무지게 허리에 검은띠를 둘러매더니 제 이름이 다 보이도록 축 늘어뜨렸다.

"근데, 우리 아들 이름이 너무 다 보이는 거 아니야?"

"그게 왜?"

"요즘 이상한 사람들도 있단 말이야. 네 이름이 뭔지 굳이 남들에게 알릴 필요는 없잖아. 이름 좀 안 보이게 하고 가면 안 될까?"

"이건 이름이 있는 건데 왜 가려?"

"저번에 누나 얘기 안 들었어? 모르는 아저씨가 누나한테 물 사줬다며?"

몇 달 전에 딸이 가게에 갔는데 웬 아저씨가 딸에게 물을 사줬다고 했다.

"합격아, 너 그 아저씨 아는 사람이야?"

"아니 몰라."

"혹시 전에 엄마랑 같이 근무하던 직원이었어?"

"모르겠는데?"

내가 사는 곳은 전에 같이 근무했던 직원들도 많이 사는 편이라 언제 어디서 만나더라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은 평일 오후였고 근무시간 중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직원은 아닌 것 같았다.

나는 아이들 가방에도, 거기 달고 다니는 자그마한 물건에도 이름은 쓰지 않았다.

요즘은 무서운 세상이다.

최대한 조심해야 했다.

흉흉한 뉴스는 계속 들려오고 있었고 그때 그 사건 이후로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10살 아들은 왜 당당하게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그 띠를 굳이 숨겨야 하냐며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면서 살짝 길게 나온 띠를 옆으로 돌리면서 말했다.

"엄마, 이렇게 하면 이름이 잘 안 보이지?"

"그냥 차라리 그걸 허리에 감아버리는 게 어때?"

"왜 그렇게까지 해야 돼?"

"남들이 네 이름 볼까 봐 그러지. 너도 학교에서 배웠잖아. 이름을 먼저 알아내서 그렇게 처음에 접근한다고."

"에이. 걱정하지 마 엄마. 난 절대 안 속아 넘어간다고! 안 넘어갈 자신 있어! 호신술도 배웠잖아!"

"요즘은 진짜 조심해야 되는 세상이라니까."

쉿, 쉿,

너희가 검은띠를 딴 건 정말 자랑스럽지만 이름은 소문내지 말자, 제발.


내가 너무 지나친 건가?

세상이 오죽 험해야 말이지.

아들은 이제 검은 띠도 땄는데 뭐가 걱정이냐며 큰소리쳤지만 그래도 엄마 마음은 또 그런 게 아니다.

세상 일이 어디 다 내 마음 같은가 말이다.

다만, 만에 하나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거든 그때가 바로 검은띠 1단의 실력을 발휘할 때인 거야.

합기도 학원에서 배운 호신술을 최대한, 적극적으로 실습해야 한다.

실은, 그러라고 그 학원도 보낸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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