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핫이슈는 고추밭에서

친정 엄마가 간추린 이슈

by 글임자
2023. 8. 5.

< 사진 임자 = 글임자 >


"OO 할매 돌아가셨단다. 올해 백 셋이다. 요양원에 10년은 더 있었을 것이다. 막내 작은 아빠도 오셨다. 그 집에서 동네 양반들한테 음식 대접한다고 수박을 샀는디 속이 다 상했다고 하더라. 이장이 사진 찍어서 다른 것으로 바꿔 왔단다. 나는 먹어보도 안 했다."


토요일 오후 5시도 넘은 시각, 여전히 폭염은 두통까지 일으킬 지경이었고 내일모레 칠순이 되는 친정엄마는 손으로는 부지런히 고추를 따시고 입으로는 동네 최신 핫이슈를 내게 전달해 주셨다.


"아침 먹었냐? 오늘 오후에 와야쓰겄다. 고추 좀 딸란디 더운께 5시나 넘으믄 온나."

토요일 아침 7 시경에 엄마가 전화하셨다.

아침 일찍 엄마에게 전화가 온다는 건 필시 급한 용건이 있으시다는 의미다.

한여름이고, 고추 말고는 다른 농작물은 크게 신경 쓸 거리가 없었으므로 본능적으로 고추밭에 투입될 것이라는 걸 알았다.

가만히 있기만 해도 더운데 이렇게 펄펄 끓는 날씨에 고추밭으로 호출을 당하다니.

시간이 갈수록 체력이 예전만 못하고 특히 더위를 잘 타는 체질로 변해가는 중이라 고추가 익어갈 무렵이 나는 가장 두렵다.

하지만 칠순을 코앞에 두고 있는 노모도 거뜬히 하시는 일을 더위를 핑계 삼아 나는 빠지겠다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예로부터 백지장도 맞들면 낫고 '고추도 같이 따면 더 빨리 딴다'는 속담이 있지 않은가.

나는 친정 외출이 뜸한 편은 아니지만 갈 때마다 엄마는 늘 새로운 뉴스거리를 준비해두고 계신다.

"이참에 초상났을 때 그 집에서 동네 양반들한테 수건을 한 장씩 줬는디 느이 아빠는 그것도 산에다 놓고 왔단다."

친정 동네는 자식들 결혼식 음식장만을 하고 난 후에는 양말이나 버선을, 초상이 나면 답례의 의미로 수건을 돌린다.

그런데 가만, 수건을 산에 놓고 오셨다고?

수건이 산에 있다 = 묘 만드는 일에 참여하셨다

"엄마, 아빠 몇인데 묫자리 만드는 일에 가셨어? 아빠도 곧 여든인데?"

세상에, 이 뙤약볕에 노인들이 산에 오르셨다니.

"어쩌겄냐, 사람이 없는디. 자기 식구들끼리 한다고 해도 누구 하나 할 사람이나 있냐?"

"그래도 이렇게 더운데 뭐 하러 가셨어. 큰일 나려고."

"다 나이 든 양반들이 가서 일했제."

"포클레인이 하면 되잖아."

"그래도 때 입히는 것은(묘에 잔디 입히는 일) 해야제."

"그냥 딴 데서 사람을 불러서 하지. 다들 연세도 많은데 큰일 나."

어쩌면 십여 년 전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동네 분들에게 받은 도움을 품앗이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도 말은 그렇게 했지만 동네에서 가장 젊은 축에 속하는 이가 쉰을 바라보는 청년(?)이었고 대개가 70대 이상이다. 그나마 할아버지들은 많이 돌아가시고 할머니들만 남은 집이 많다.

그곳은 외지인들이 많이 들어와 집을 짓고 살기도 하지만(그들도 이미 노년에 접어든 이들이 많다)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들이라 이 폭염에 기꺼이 산까지 오를 이를 찾기 힘들지도 모른다. 동네 사람들은 수 십 년 쌓아 온 정이라도 있지만 외지인들은 얼굴 한 번 본 적이 없는 할머니를 위해 삽을 들고 잔디를 입히는 일까지는 무리일지도.

2023. 8. 5.

"저기 호박이 많이 열렸네."

고추밭은 지대가 낮고 옆에 돌담이 있는데 그 담 아래로 크고 작은 호박이 주렁주렁 열렸다.

없던 입맛이 생기는 것 같았다.

"저것이 처음에는 하나도열리더구만 늦게사 많이 열린다. 저기 위에도 여러 개 달렸더라."

이번에도 역시 엄마는 손으로는 부지런히 빨간 고추를 연신 따시며 내쪽을 힐끗 보시곤 대꾸하셨다.

최근 계속되는 폭염에 호박잎 많이 상하기도 했지만 그나마 성한 것들을 따다가 된장국이라도 끓여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2023. 8. 5.

"아이고, 여기 호박이 이렇게 큰 것이 열렸었다. 인자 처음 봤네. 나는 무거워서 들지도 못하겄다. 너 따서 가져갈래?"

고추밭 가장자리에도 호박을 심었는데 잎이 하도 커서 그동안 그 아래에 가려져 모르고 있었던 호박 한 덩이를 발견했다.

내 얼굴보다 훨씬 더 크고 실하게 여문 그것을 따서 마루에 놀려놓고 보니 든든하다.

고추가 풍년이 들어야 할 텐데 엉뚱한 호박이 풍년 들겠다.

느닷없이 숨은 호박 찾기를 하며 고추만큼 빠알간 두 얼굴에 벌써 입맛 다시는 표정이 역력했다.

"엄마, 저거 따서 고등어랑 같이 조림 해 먹읍시다. 엄마가 해준 게 맛납디다."

"저것은 뭣에다 해놔도 다 맛나제."


다음날, 엄마는 급히 메뉴 변경차 내게 전화하셨다.

"지금은 갈치랑 해 먹으믄 맛나단다. 올 때 갈치나 사와라. 고등어는 냅두고."

하지만 나는 고등어에 대한 미련을 쉽사리 떨칠 수 없었다.

짜장면을 선택하면 짬뽕에 대한 미련이 남기 마련이니, 이왕이면 짬짜면 먹듯 고갈(고등어+갈치) 조림을 기대하며 공평하게 고등어와 갈치를 공수해 놨다.

오랜만에 식욕이란 것이 꿈틀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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