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3. 21. 숨은 수세미 찾기< 사진 임자 = 글임자 >
"세상에! 아크릴 수세미랑 미세 플라스틱이랑 상관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해봤는데."
"엄마. 그거 알아? 어떤 거북이 배 속에 플라스틱이 들어있었다는 그 뉴스 말이야."
"엄마도 봤지. 근데 우리가 설거지할 때 쓰는 수세미에서 미세 플라스틱이 나온다는 건 몰랐어. 심각하다 정말."
그러니까 내가 수세미를 직접 심고 키워서 설거지할 때 쓰기 시작한 건 내게도 일말의 양심은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대단한 환경 운동가는 아니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범위 내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뭔가 해야겠다고 다짐하기 시작했다.
3월 말, 이제는 슬슬 씨앗들이 땅속으로 들어가야 할 시기인데 뜻밖에도 나는 '수확'을 했다. 씨 뿌릴 시기에 거두어들인 것이다.
친정집 텃밭은 집 마당보다 조금 지대가 낮은 곳에 위치해 있어서 돌담같이 쌓아 마당과 텃밭을 경계 지었다.
작년에도 여기저기에 수세미 씨를 심고 작년 겨울 느지막하게 거두어들였는데 얼마 전에 그 돌담 위에 몇 개의 수세미가 바싹 마르다 못해 푸석푸석한 모습으로 애처롭게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것이 아니가.
돌 색이랑 수세미 색이랑 비슷해서(수세미는 처음엔 녹색을 띠다가 완전히 여물고 안에 씨앗까지 생기고 11월이 넘어가면서부터는 겉껍질과 수세미 자체가 안이고 밖이고 바싹 말라 돌과 비슷한 색을 띤다.) 그동안 그 돌담 근처를 수 백 번도 왔다 갔다 하면서도 전혀 몰랐었다. 마치 보호색인 것처럼 시치미 뚝 떼고 얌전히 매달려 있었으니 알 턱이 있나.
작년 태풍 '힌남노'가 휩쓸고 간 자리는 황폐했었다. 농작물은 말할 것도 없고 내가 심어 둔 수세미도 무사하기 못해 몇 그루는 중간에 말라죽은 것이 속출했었고 총 15개 정도의 씨앗을 심었는데 거기서 수확한 수세미는 20개도 채 안 된다.
수세미 씨앗 하나를 심으면 거기에서 수세미가 열 개고 스무 개고 주렁주렁 열린다. 그 생명력이란 참 볼수록 놀랍기만 하다.
작년에는 이런저런 일들로 수세미 심는 시기를 놓쳐서 나중에 부랴부랴 심고 매일같이 물을 주다시피 해서 길렀다. 아니, 살려냈다.
정말 금이야 옥이야 하면서 말이다.
장마철이 되기 전까지 좀 가문 편이라 혹시라도 죽어버릴까 봐 얼마나 조마조마하면서 애를 태웠던지...
자식들도 아프고 기운 없으면 걱정인데 말도 못 하고 움직이지도 못하는 수세미가 목마른 채로 땡볕에 축 처져 있으면 내 마음이 다 쓰려왔다.
처음 떡잎 두 장을 본 날은 우리 아이들이 태어났을 때만큼이나 기뻤고, 처음 꽃을 피운 날은 내가 뭔가 성공한 느낌이었으며 수세미가 여기저기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모습을 볼 때면 팔불출이 자식 자랑하듯 사방에 뽐내고 싶었다. 겨울 막바지에 잘 마른 수세미를 수확한 후 껍질을 벗기고 새까맣고 납작한 씨앗들이 우수수 떨어질 때의 그 보람이란, 이루 다 표현할 수 없다.
유난히 수확이 소박했던 작년엔 여기저기 나누어 줄 만큼 양이 많이 나오지는 않았다.
잔뜩 수확해서 지인들에게 마구 퍼주고 싶었던 의욕만 앞서고 결과물은 내세울 게 없으니 조금 의기소침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날 돌담에 마지막까지 질긴 줄기에 매달린 채 해를 넘긴 수세미를 보고 있노라니 대견하기까지 했다.
작년 겨울은 유난히도 추웠고 폭설이 내린 적도 몇 번 있었는데 이렇게 이듬해 봄이 올 때까지 무사히 그 자리에 있었다니, 뿌리가 썩지도 않고 줄기에서 떨어져 나가지도 않고 1년 가까이 버텨낸 그 생명력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합격아, 이것 봐라. 수세미가 아직도 남아 있었어!"
"진짜? 어떻게 지금까지 있어?"
"엄마도 몰라. 진짜 신기하지. 겨울에 얼어 죽지도 않고 계속 달려 있었나 봐."
"진짜 신기하네."
"돌담 위에 있던 걸 우연히 발견했다니까. 아직까지 멀쩡히 살아 있을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우와. 진짜 어떻게 지금까지 멀쩡하지? 신기해."
"식물이지만 정말 생명력이 대단하지? 뿌리가 아직도 안 썩고 살아 있으니까 이 수세미도 안 썩고 계속 달려 있을 수 있는 거야. 뿌리가 썩으면 진작 줄기에서 떨어져서 수세미도 새카맣게 썩어 버렸을걸?"
실제로 뿌리가 부실하면 줄기도 썩어 들어가고 거기 달린 수세미도 새카매지면서 곰팡이가 피어오른다. 당연히 설거지용으로는 불합격이다.
마지막 수확을 하는 순간까지 온전히 줄기에 붙어 있어야 따고 난 후 말릴 때도 깨끗하게 잘 마른다.
그렇게 잘 마른 수세미가 설거지할 때 사용하더라도 더 질기고 오래간다.
바스락바스락 딱딱하게 마른 그 두꺼비 등짝 같은 수세미 껍질을 까고 나니 아랫부분에서 검정 씨앗이 와르르 쏟아졌다.
그 씨앗들을 무슨 금은보화 보듯 했음은 물론이다.
수세미 하나에 씨가 50개에서 100 개 정도씩은 들어 있는 것 같다.
올해도 어김없이 수세미를 심어야 하니 속을 탈탈 털어 몇 줌이나 되는 씨를 잘 모아두었다.
3월 말에 만난 늦둥이 수세미다.
사람도 그렇고 늦둥이들은 이렇게나 예쁘고 여느 것들과는 다른 기쁨을 준다.
금쪽같은 내 수세미들, 이쁜 것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