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세미 씨앗을 세 개씩 심었다.
올해는 다다익선 전략이다.
2023. 3. 30. 수세미 씨앗< 사진 임자 = 글임자 >
'하나는 땅속 벌레 몫, 하나는 새와 짐승의 몫, 나머지 하나가 사람의 몫'
그래서 콩을 심을 때 보통 세 알을 심는다고 들었다.
단순히 사람이 먹을 생각으로 제 몫만 챙기는 것이 아니라 땅속과 땅 위를 굽어보고 살뜰히 챙기는 그 마음, 같은 생명이 있는 존재로서 다른 생명도 귀히 여기는 마음이 그 세 알을 집어 들게 한 것은 아닐까.
수세미 씨앗을 누가 먹을 성싶지는 않았으나 나는 한 구덩이에 꼭 세 알씩 그 납작하고 까맣고 길쭉한 것을 심었다.
올해로 4년째이던가?
생각해 보니 모든 씨앗이 다 싹을 틔우는 것은 아닌데 그동안 미련하게 한 구덩이에 하나의 씨앗만 심어 왔다는 것을 문득 떠올렸던 것이다.
그러다가 예로부터 농부들이 콩을 심을 때 서 너 개씩 심는다는 그 이야기가 머리에 스쳤다.
여유 있게 심어서 나쁠 것은 없었다.
그러니까 다른 생명체들을 먹이기 위함보다는 내 나름대로 안전한 여유분의 차원에서 세 개를 집어든 것이다.
그 세 개의 씨앗 중에 하나라도 멀쩡히 싹을 틔우면 성공인 셈이니까 말이다.
작년에는 딱 하나씩만 심었더니 발아율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나중에 마당 여기저기 흩어져 싹을 틔운 수세미 모종을 파서 옮겨 심었다.
그 모종들을 정기적으로 물을 줘 가며 길렀더니 제대로 뿌리 잡고 새 땅에서 높이높이 멀리멀리 줄기를 뻗어가 잎이 무성해지고 샛노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었다.
직업으로 농사를 짓는 것은 아니지만 온전히 나의 힘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식물을 심고 열매를 거두고 씨앗까지 수확하고 있다. 그만큼 수세미가 키우기 쉽다는 방증도 될 것이다.
비료 같은 것은 무엇을 어떻게 주어야 하는지도 모를뿐더러 처음에는 '시험 삼아' 한번 심어본 것이 의외로 첫해에 수확을 제법 많이 하게 돼서 아직까지 첫해에 딴 수세미를 보관 중이다. 나는 단지 물을 주고 쓰다듬어 주고 줄기를 살짝 손봐주고 무럭무럭 자라나는 그것을 어여삐 여긴 게 다였다.
꼭 오이처럼 길쭉하게 생긴 그 새파란 것이 처음 열렸을 때는 정말 오이 모종을 잘못 심은 줄로만 알았다.
꽃도 꼭 오이꽃을 닮았고 그 꽃을 꽁무니에 달고 길어나는 손가락만 한 그 수세미 열매는 얼핏 보면 오이라고 해도 깜빡 속아 넘어갈 만큼 둘이 서로 비슷했기 때문이다.
나중에 달이 차고 점점 도깨비방망이 같은 모양새를 갖추고 살찐 오이처럼 배 가운데가 볼록하게 부풀어 오르고 나서야 나는 그것이 수세미가 틀림없음에 안심을 했다.
수세미 씨앗을 심기 전에 싹을 빨리 틔울 요량으로 사나흘 정도 물에 담갔는데 그 어느 부분에서도 싹이 틀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미리 물에 담가 놓은 이유는 아빠가 각종 씨앗들을 심기 전에 물에 미리 담가 두었다가 심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아직은 좀 이른 감이 없지 않아 있어서 그런지도 몰랐다. 3월 언젠가 초여름 날씨처럼 느껴졌던 날이 지속된 주가 있었고 나는 그 틈을 노려 올해는 일찌감치 서둘렀던 것이다. 그런데 3월 말부터 지금까지 꽤나 쌀쌀한 날씨가 이어지고 있어서 나는 조바심만 났다.
차라리 그때 싹을 틔우지 않은 게 다행스러웠다.
하긴 다 때가 있는 법인데 나만 혼자서 서두른다고 될 일도 아니었다.
아직은 아닌 거다.
인력으로 어찌해 볼 수 없는 일들이 세상에 분명 존재한다.
내가 아무리 부지런을 떨어 봐야 그 시기가 아직 오지 않았으면 씨앗도 쉽게 입을 벌리지 않을 거였다.
수세미를 심은 지 거의 열흘 정도 되어가길래 주말에 가서 행여나 하고 두 눈 부릅뜨고 살펴봤지만 여전히 감감무소식들이다.
이렇게 조바심만 잔뜩 내서는 될 일도 안될 거다.
자연의 순리를 받아들이고 기다리고 그저 맡기면 될 것인데 왜 이렇게 수선을 피우는지 새삼 나의 참을성 없음에 스스로가 놀랐다.
최근 이틀 정도 내린 비로 땅은 축축한 흙냄새를 폴폴 풍기며 발을 마구 내디뎌도 질퍽하지 않을 만큼 기분 좋게 발자국을 남기고 있다. 물기를 잔뜩 머금은 대지 위로 철도 모르고 무작정 덤비는 성급한 인간이라니.
좀 느긋해지기로 했다.
때가 되면 어련히 알아서 고개 내밀까.
갑자기 말갛게 씻긴 수세미 씨앗을 보다가 불현듯 '저건 혹시 수박씨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아마도 수박씨를 심는 거라고 오해할 수도 있을 만큼 또 둘이 닮았다.
수박이든 수세미든 그저 건강하게 싹만 잘 틔우면 좋겠다고, 너무 깊숙이 묻혀 나오는 데에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지 않도록 성질 급한 나는 구덩이를 깊이 파지 않고 흙을 잘 덮어주는 것으로 올해 농사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