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렁주렁 수세미

보고만 있어도 배부른 건 아니지만

by 글임자
2023. 9. 2. 수세미

< 사진 임자 = 글임자 >


"올해는 설거지 좀 하게 생겼네. 진짜 많이 열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엄마?"

"수세미가 저렇게 많이 열렸잖아. 잘 키우면 나중에 설거지할 때 요긴하게 쓰겠다 이 말이지."

"그렇구나. 난 또."

당장이라도 저 수세미를 따다 그릇을 박박 문질러 닦아보고 싶어 근질근질했다


내가 씨앗을 직접 심은 수세미는 겨우 한 두 개 정도 싹을 틔웠지만 미처 제때 수확하지 못하고 줄기에 매달린 채 그대로 방치됐던 수세미들은 겨울을 나고 해가 바뀌는 동안 씨앗이 떨어져 자연스레 새 생명으로 태어났다.

그렇게 돋은 수세미가 제법 된다.

마당 멀리 떨어져 있는 텃밭 여기저기에, 처마 밑 그늘진 자갈밭에도, 상추 씨를 뿌려 놓은 잘 고른 흙에서도 두 잎씩 떡잎을 보였다. 수세미의 생명력은 이렇게나 질기고도 대단했다.

벌써 수확해도 되지 않을까 싶게 통통하게 자란 수세미가 있는가 하면 이제 샛노란 꽃망울을 터뜨리는 어린것들도 꽤 있다.

지금 이 순간 나는 부자가 하나도 안 부럽다.

나야말로 다 가졌다.

적어도 수세미 씨, 수세미 꽃, 수세미 열매, 여기서 더 욕심 부리면 벌받지.

도깨비방망이 같은 저것들로 늦가을에서 초겨울이 될 때까지 단단하고 꽉꽉 여물게 해서 설거지용 수세미를 만들어야지, 좀 어린 수세미는 기관지에 좋다니까 몇 개쯤 따다가 수세미 진액을 만들어야지. 먹지도 못하는 거 저거(먹으려고 마음만 먹으면 못 먹을 것이야 없겠지만, 맨 정신으로는 솔직히 그냥 먹기는 힘들긴 하다.) 비싼 값에 팔리는 것도 아닌데(팔 마음도 추호도 없거니와) 보고만 있어도 뿌듯하다.

비록 내 땅은 아니고 아빠 소유의 땅이지만 허락도 없이 일방적으로 수세미를 키우겠다고 벌써 몇 년째 선포하고 시작한 일이지만 생명이 태어나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다시 새로운 생명을 품는 것, 이런 것을 보고 있으면 숭고해지기까지 한다.


작년엔 수확량이 저조해서 나눔 할 거리도 없었다.

과일나무처럼 수세미도 해거리를 하는 건지 재작년엔 실하게 열렸던 것이 작년엔 형편없이 흉작이었다.

나는 다만, 인간의 힘으로 맞서 볼 수 없는 태풍과 가뭄 같은 자연재해 때문이라고 변명하고만 싶다.

하지만 올해는 다르다.

사방에 주렁주렁 매달려있다.

친정에 가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안 본 사이에 수세미가 얼마나 더 컸는지를 살펴보는 일이다.

엊그제 꽃망울이 맺힌 것 같았는데 활짝 꽃으로 활짝 피어나고 어느새 오이인지 수세미인지 헷갈리는 그것들이 지지대를 타고, 돌담을 타고 여기저기로 마구마구 영역을 확장해 나가고 있는 것을 보면 나는 신이 나서 춤이라도 출 수 있을 것만 같다.

아무래도 난 수세미 키우는 데에 탁월한 소질이 있나 보다.(하고 단단히 착각을 하고 있다.)

(하지만 수세미는 혼자 나고 혼자 알아서 잘 자라고 있다.)

솔직히 난 딱히 해 준 것도 없고 날이 가물 때 한번씩 물을 뿌려 고 대중없이 산만하게 돋은 그것들을 어릴 때 뽑아서 다시 일정한 간격으로 심어 준 것 말고는 손 넣은 게 없어서 수세미 농사에 대한 지분을 주장할 만한 자격도 없다.


올해로 벌써 3년째인가 4년째인가.

직접 심어서 키운 천연 수세미로 설거지 한 번 해보겠다고 무작정 달려들었던 나다.

자식들 쑥쑥 크는 것 보는 재미도 재미지마는 매일 쓰다듬어 주며 봐주지 않아도 혼자 뭐든 다 해내며 커가는 생명들을 보면 그것만큼 가슴 벅찬 일도 없다.

그럼, 이제 슬슬 나눔 할 사람들 리스트를 작성해 볼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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