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미야, 사랑해

너 없인 안돼

by 글임자
2023. 10. 16. 늦둥이 수세미꽃

< 사진 임자 = 글임자 >


난 너에게 완전히 반해버렸어.

우리가 처음 만난 날, 난 다시 태어났지.

넌 말이야,

보면 볼수록 사랑스러워.

평생 나와 함께 해 줘!


올해는 작년보다 더 일찍 수세미를 수확했다.

그냥 씨앗이 땅에 아무렇게나 떨어져서 돋은 수세미들이 일찍 돋아서 9월 말부터 익은 수세미들이 제법 보였다.

숫자에는 약하지만 저 정도면 앞으로 1년 동안 충분히 여유 있게 쓸 수 있을 것 같다. 주위에 나눔 할 양도 제법 나오겠다. 사방에 돋은 수세미가 자신들을 잊지 말아 달라고 새까맣게 익어가고 있었다.


"난 이거 진짜 별론데. 꼭 이걸로 설거지해야 돼?"

"분기에 한 번 설거지할까 말까 한 사람이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

"진짜 불편하다니까. 정말 좋은지 모르겠어. 난 별로야."

"난 좋기만 한데. 어차피 설거지 거의 하지도 않잖아. 내가 다 하지. 주로 설거지하는 사람이 쓰기 좋은 걸로 쓰면 되는 거지. 어차피 설거지할 생각도 없잖아?"

"아무튼 진짜 별로야."

"아크릴 수세미에서 미세 플라스틱이 그렇게 많이 나온다잖아. 몰랐으면 모를까 이젠 이 천연 수세미로 설거지할래. 처음이라 그렇지 하다 보면 익숙해져."

"하여튼 유난스럽기는. 그렇게 혼자 유난 떤다고 뭐가 달라져? 왜 그렇게 혼자만 유난이야? 남들은 이런 거 쓰지도 않아! 적당히 좀 해!"

"이게 뭐가 유난스러워? 나 하고 싶은 걸로 설거지하는 게 유난스러워? 하여튼 내가 뭐만 한다고 하기만 하면 반대하더라. 내가 설거지해 달란 것도 아닌데 왜 그래?"

"이런 걸 왜 쓰나 몰라. 진짜 별론데."

이 양반이 보자 보자 하니까!

내가 진짜 별로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너무 소중해 가슴속에만 간직하기로 한다, 가정의 평화를 위하여.

아마,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아무도 짐작조차 못할 것이다.

하늘도 모르고, 땅도 모르고, 나만 알겠지?

세미가, 나는 좋다, 사랑스럽기까지 하다.

설거지 주 담당자가 마음에 들면 그만 아닌가?

내 말끝마다 토를 달고 꼬투리 잡고 불만인 거,

이런 걸 고급 전문 용어로 '잔말이 많다'라고 한다지 아마?

2023. 10. 16.

그러니까 세미와 나와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됐다.

2019년 육아휴직을 시작하고 천연 수세미를 우연히 알게 됐고 처음에는 인터넷으로 주문을 해서 사용했다.

결코 저렴한 가격은 아니었다.

국내산 100%라고 했다, 그 어떤 가공 처리도 하지 않았다고 했다.

천연에 천연을 더해 알짜배기, 진짜 그 자체라고 했다.

그래서 두 개에 1만 원 가까이 주고 구입을 했다.

"이런 걸 돈 주고 사서 설거지한다고? 이게 설거지되기나 해? 하여튼 쓸데없는 건 사가지고는."

이라며 그 양반에게서 지청구를 듣는 일도 혹독하게 통과의례로 거쳤음은 물론이다.

아울러 그 양반의 말에 나는 콧방귀도 안 뀌고 '다 무시했음'도 또한 물론이다.

나야말로 그 양반에게 그런 말을 하고 싶은 적이 어디 한 두 번이었던가.

"이거 설마 돈 주고 산 건 아니지? 돈 주면서 가져가라고 해도 안 가져가겠다."

라고 대놓고 그 양반에게 종종 말하는 사람은 단연 나였다.

이렇게 우리는 서로 이해가 안 되는 사람들이었다.

대개 내가 하는 많은 일들에 대해 불만이고 결사반대했는데 특히, 그 양반은 나의 수세미 사랑을 이해할 수 없어했다.

2023. 10. 16. 수세미 단면, 100개 가까이 씨가 가득 들어 있다

"이거 비누 받침으로도 쓸 수 있고 목욕할 때 때수건처럼 쓸 수도 있고, 마시지 할 때도 쓸 수 있어. 설거지도 당연히 할 수 있고. 천연 수세미가 뭔지 알기나 해? 바로 이게 그거야. 생각해 보니까 돈 주고 살 필요가 없겠어. 우리 집(친정)에 심어야겠어. 그러면 원 없이 갖다 쓸 수 있겠지? 수세미 액도 만들어서 애들 먹여야지. 기관지에 좋다잖아.

수세미 찬양 로드맵을 그 양반 앞에서 의욕 넘치게 프레젠테이션 했으나 그는 전혀 관심 없어했다 물론.

대신 이 말을 하는 것만은 잊지 않으셨다.

"쓸데없는 일 좀 그만해!"

이럴 때 적절하게 쓰라고 조상님들이 대대로 물려주신 아름다운 속담이 딱 있는데,

"굿이나 보고 떡이나 잡솨!"

나는 생각했다.

헌법에 아내가 무슨 일을 하기만 하면 남편은 '쓸데없는 일은 하지 말라'는 말을 하라는 의무 조항이 어딘가에 숨어 있나 보다, 하고 말이다. 나만 못 찾은 거겠지?

역시 그 양반은 '법 없이는 못 살' 양반이다.

적어도 나는 헌법에 '수세미를 심고 수확해서 설거지할 권리'가 아내들에게 있다는 것쯤은 매우 잘 안다.

2023. 10. 16. 건조가 매우 빠르다

아직 수세미의 절반도 수확 못했다.

저마다 익는 속도가 달라 이번엔 반 정도 수확 한 것이고 나머지는 몇 차례에 걸쳐 나눠서 수확하기로 했다.

미취학 아동이 있는 친구에게 딸과 함께 체험학습 하라고 껍질도 벗기지 않은 채 몇 개 챙겨 두었다.

지금 이 순간, 수세미 부자가 된 나는 행복에 겨워 웃음이 몽글몽글 거품 난다.

세미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갓 수확한 거칠거칠한 수세미로 그 양반의 등이라도 박박 문질러 주고 싶었다.

새빨개지도록, 수세미의 존재를 각인하듯이, 세로로 선명하게...

그 생각만으로도 나는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수세미가 좋은 걸 어떡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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