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선에 도전하는 어린이를 위하여
임원 선거 이브에는
2023. 8. 17. < 사진 임자 = 글임자 >
"내일 임원 선거하는데 우리 아들이 또 나가겠다고?"
"응, 내 친구들이 나 뽑아준다고 했어. 00랑 00랑 00도 다 나 뽑아 준대."
"벌써 그렇게나 많이 표를 확보했어?"
"아마 남자 친구들은 다 나 뽑을 걸? 그러면 내가 반장 될 수도 있어."
"다른 친구들도 반장 해보고 싶어 하지 않아?"
"일단은 남자는 나 혼자고 여자 친구들이 몇 명이 나오는지가 문제야. 여자 친구들이 많이 나올수록 내가 유리해. 남자 친구들은 다 나를 뽑을 거고 여자 친구들은 여자를 뽑을 거니까. 그러면 표가 다 갈리잖아."
"글쎄. 꼭 그렇게 남자 여자로 나눠서 네가 반장 된다는 보장이 있어?"
"걱정 마. 남자 친구들은 다 나 뽑을 거니까."
열 살짜리 초등학교 3학년 교실에서조차 임원선거에서 남녀 성별 대결 구조를 이룬단 말인가?
아들은 뭔가 착각한 게 틀림없다.
그것도 단단히 말이다.
"엄마, 너무 아까워. 우리 반은 여자 친구들이 남자 친구들보다 한 명 더 많은데 내가 한 표 차이로 반장 떨어졌어. 아마 여자 친구들이 다 여자를 뽑았나 봐."
"그래? 꼭 그렇지만은 않을지도 모르는데? 다 같은 성을 뽑았다고 어떻게 확신해?"
"내 말이 맞아. 그럼 어떻게 딱 한 표 차이가 나겠어?"
우리나라 선거는 비밀 투표니까 이제 와서 그때 일을 들추며 사실 확인을 해보자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인데 아들은 1학기 때 낙선의 쓴맛을 보고 와서 하필이면 반에 여학생이 한 명 더 많다는 사실을 안타까워했다.
"나 2학기 때 또 도전해 볼 거야."
이렇게 다짐하고 어느새 학기가 바뀌었다.
오늘이 바로 결전의 날이다.
"그럼 준비는 좀 했어?"
퇴근한 남편이 점검에 들어갔다.
"아니. 그냥 하면 되지."
아들은 성의가 없어도 너무 없게 대답했다.
제 아빠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음에 틀림없다.
"아무 준비도 안 하고 지금 선거에 나가겠다는 거야? 반장이 되면 뭘 어떻게 할 건지 구체적으로 얘기하고 친구들한테 너를 뽑아달라고 해야지. 적어도 어떤 마음으로 할 건지는 말해야지. 넌 반장이 왜 하고 싶어? 반장 역할이 뭔지는 알아? 최소한 반장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는 알고 나가야지 아무 생각 없이 나가는 건 아니야."
"괜찮아. 친구들이 나 뽑아 준다고 했단 말이야."
아들은 끝까지 자신의 인기(?)만을 믿고 자신만만해했다.
"그래도 이왕이면 준비를 하고 나가야지. 네가 반장 선거에 나가는 게 경험상 좋은 거지만 그걸 준비하면서 하는 여러 가지 경험도 중요한 거야. 네가 살아가면서도 도움이 될 거고. 아빠도 저번에 발표 준비할 때 집에서 많이 연습했잖아. 엄마가 옆에서 봐주고 이상한 건 고치라고 알려주고 그래가지고 발표 잘하고 왔잖아. 연습은 많이 해 볼수록 좋아."
이렇게 말하면서 남편은 마치 자신이 선거에 출마하는 사람처럼 열과 성을 다해 우리 멤버들 앞에서 연설하기 시작했다.
선거에 출마하는 멤버가 아들인지 남편인지 헷갈렸다.
그 남자, 알고 보면 은근히 극성맞다.(고 나는 생각했다.)
"자, 이제 한 번 실전처럼 해 봐."
남편 등에 떠밀려 아들이 무대에 올랐다.
"나처럼 해 봐. 먼저 간단히 자기소개를 하고 앞으로 우리 반을 위해서 이렇게 이렇게 하겠다. 나를 뽑아 달라. 이렇게 말하고 인사하고 들어오면 돼. 알겠어?"
아들보다 먼저 딸이 잽싸게 나서서 실전 선거 분위기를 조성했다.
"우와, 누나. 잘한다. 누나도 나가 봐. 그렇게 잘하면서 왜 안나가?"
"난 안 해."
"안 한다면서 왜 그렇게 열심히 해?"
선거철만 다가오면 세상 소극적인 소녀로 돌변하는 딸, 이번에도 동생의 임원선거에만 감 놔라 배 놔라 지시할 뿐 정작 자신은 감투(?)의 야망이 없다고 선을 확실히 그었다.
"그럼 엄마가 내일 아침에 미역국 안 끓여야겠네."
"왜?"
"미역국을 먹으면 미끄러진다는 그런 말이 있거든. 시험을 본다거나 중요한 일을 앞두고 피하는 음식 같은 게 있거든."
"에이 엄마. 그런 거 다 미신이야 미신. 지금 때가 어느 땐데 그런 걸 믿어?"
그럼 그렇지, 딸이 결코 호락호락 넘어가지 않을 줄 알았다.
"그래. 합격이 네 말도 맞지만 그래도 왠지 미역국은 안 끓이고 싶다. 다른 메뉴로 정해야겠어."
"하여튼 엄마는..."
우리 아드님이 재선에 도전하시겠다는데, 엄마가 그 미끄덩거리는 미역을 굳이 꺼낼 필요야 없지 않은가?
임원 선거를 하루 앞둔 날 저녁 연설문이라도 작성했는지 꼬치꼬치 캐묻기는 했지만, 남편과 함께 몇 시간에 걸쳐 벼락치기 선거 준비를 하기는 했지만, 행여라도 당선될 것을 대비해 당선 소감 정도는 미리 준비해야 하지 않겠느냐며 넌지시 한마디 하기는 했지만, 당선되면 저녁에 파티라도 열어야겠다고 메뉴를 미리 주문받아 놓기는 했지만, 비록 출처가 불분명하고 그 근거도 전혀 과학적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선거 당일 아침에 미역국 같은 건 철천지 원수 보듯 하지만... 난 절대 극성 엄마는 아니다.
아닌 거 맞겠지?
그저, 단지, 아들의 선거 출마에 살짝 지지만 해 줄 뿐, 엄마 입장에서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역할만 할 뿐이다.
이거, 엄마가 돼서 너무 아무것도 안 하는 거 아닌가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