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딸이 반성문을 다 쓰다니!
세상에 만상에! 내 딸이?
2023. 6. 21. 속뜻 국어사전에서< 사진 임자 = 글임자 >
"합격아, 오늘 왜 이렇게 늦었어?"
"반성문 쓰느라고."
평소보다 하교가 늦은 딸의 입에서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나왔다.
반, 성, 문, 이라고?
내가 생각하는 그 반성문이 네가 말하는 그 반성문이 맞는 것이냐 정녕?
반성문이라는 세 글자를 듣고 나는 잠시 어안이 벙벙했다.
아니, 너무 당혹스러웠다.
아들이 아니라 딸이 반성문을 썼다고 했다.
군대는 아직도 안 갔지만 학교는 잘 다니는 열 살 아들은 이미 하교하고 집에서 안정을 취하고 계셨다.
분명 그때 현관문을 통과한 이는 딸이었다.
세상에!
3살에 벌써 노트 선에 줄 맞춰 동그라미를 일정한 간격으로 그리고 질서 정연하게 숫자를 쓰고, 4살 때 동화책을 술술 읽었으며, 5살에는 내 담당 업무였던 '체납세금 징수대책 보고대회' 받아 쓰기를 하고 농민 신문을 보시던 외할아버지 옆에서 함께 신문도 보던 아이였는데, 5살이 되어 처음 유치원이란 곳을 갔어도 전부터 다니던 아이들에게 전혀 밀리지 않았었는데, 6살이 채 되기도 전에 가족들 이름을 호명하며 세 글자씩 또박또박 하나도 안 틀리게 쓰던 아이였는데, 여섯 살 때부터 영재 검사를 한 번 받아 보라며 주위에서 더 아우성치던 딸이었는데, 손놀림이 섬세해서 가위질을 어찌나 잘하는지 어린이집에서 선생님 보조 역할을 한몫 톡톡히 한다며 칭찬만 듣고 자라던 아이였는데, 어린이집에 간 지 몇 달 만에 '송사'를 맡아 드레스 입고 집에서 예행연습을 완벽하게 해내던 아이였는데, 초등학교 입학했을 때는 '워낙 모든 걸 잘해서 나무랄 데가 하나도 없다.'는 담임 선생님의 말씀을 지겹도록 듣던 아이였는데, 일 년에 몇 번씩은 어떤 최우수상과 우수상과 특별상 이런 것들을 종종 받아 오던 아이였는데, 그랬던 아이였는데 반성문이라니, 반성문이라니!
"합격아, 무슨 일 있었어? 반성문은 왜 쓴 거야?"
"선생님이 책상 위에 교과서랑 필기도구만 올려 두라고 하셨는데 선풍기 올려놨다고 반성문 쓰래."
일단 내가 염려했던 부분에서 지적을 받은 건 아니라 다행이었다. 물론 그런 지적을 받을 그런 어린이도 아니다 내 딸은.
혼자서만 지레 앞서가며 호들갑 떨었던 엄마는 다소 안심했다.
"선생님이 먼저 경고 안 하시고 바로 반성문 쓰라고 하셨어?"
"전에는 한 번 경고하고 했는데 오늘부턴 경고 안 하고 바로 했어. 하필 오늘 내가 걸렸어."
"그랬구나. 뭐라고 썼는데?"
일단 불미스러운 사건에 연루된 것은 아니니 괜찮다. 그럴 수도 있지 뭐.
학창 시절 학교에서 반성문이라고는 한 번도 써 본 역사가 없는 나는 속도 없이 그 내용이 무척이나 궁금했다.
"학급 규칙을 잘 지키겠습니다."
"그게 반성문 다야?"
"그걸 스물여섯 번 썼어."
다소 신박한 반성문이다.
역시 내 딸이야.
그래. 반성문은 그렇게 요건만 간단히, 앞으로의 의지를 듬뿍 담아서.
"규칙을 정했으면 그걸 다 같이 지켜야지. 별 거 아니라고 무시하고 한 두 명 안 지키다 보면 엉망이 되고 선생님도 다 통제할 수가 없어. 그리고 선풍기 같은 건 떨어지면 소리도 시끄럽잖아. 그리고 책상도 안 넓은데 이것저것 다 늘어놓으면 공부에 집중도 안될 거고. 엄마도 너희 책상 위에 이것저것 많이 올려놨다가 떨어지면 시끄럽다고 자주 말했었잖아. 우리 집에선 너희 둘이지만 너희 반은 스물여섯 명이잖아. 서 너 명만 수업 중간에 물건 떨어뜨려도 수업 방해 될 거야. 넌 어떻게 생각해? 선생님도 그런 규칙을 정한 이유가 있으실 거야. 선생님 말씀처럼 수업에 딱 필요한 것만 올려놓는 게 좋겠다. 에어컨도 튼다며. 그렇게 더운 건 아니지?"
"그렇긴 하지."
"앞으론 좀 더 신경 쓰고 조심하면 되겠다. 규칙이 정해졌으면 너 하고 싶은 대로만 하면 안 돼. 단체 생활을 할 때는 어느 정도 규칙을 정하고 따르는 게 필요해. 네가 판단하기에 너무 부당하거나 이상하면 무조건 따르지 않아도 되겠지만 말이야. 그럴 땐 선생님께 네 의견을 말해보는 것도 좋겠지?"
"응, 알았어."
아직은 열두 살, 선생님의 규칙 아래 어느 정도는 통제가 가능한(가능하다고 믿는다, 가능할 것이다, 가능해야만 한다.) 나이이긴 하다.
그러나 어느 순간 엄연히 법으로 정해진 수많은 것들조차 가볍게 무시하고 제 멋대로 행동하는 덜 큰 어른이 세상에는 일부 있는 것 같다.
남을 보지 말고 나를 먼저 보라 하셨다.
남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할 것도 아니라고 하셨다.
나도 양심상 법 앞에 항상 떳떳하다고는 말할 처지가 못된다, 부끄럽게도.
나도 저런 시절이 있긴 했겠지.
왜 우리는 어릴 때 학교에서 배우고 배워도 자라면서 많이 변해버리는 걸까.
단순히 의지의 문제만은 아닌 것 같다.
한 가지만은 분명해 보인다.
어른들은, 부모는, 아이들을 말로만 가르치는 게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고 가르친다는 사실, 그것만은 명심해야 할 것이다.
우선은 나부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