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10. 12. 첫 만남에 김밥 도시락, 지나쳐
< 사진 임자 = 글임자 >
"직접 보니까 생각했던 거랑 많이 다르네요."
말 한마디에 천 냥 빚을 지고 연 1,000%의 고금리 이자가 붙는 순간이었다.
도대체 뭘 생각하고 기대했던 걸까?
어머나 별 꼴이야. 누가 할 소리?
나라고 할 말이 없는 줄 아나 봐.
"난 저~~ 어언혀 기대도 안 했어요."
유치하지만 저런 말이라도 하고 싶었다.
반사하고 싶은 마음을 억눌렀다.
서로 생각과는 딴판인 상대방을 보며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던 첫 만남이었다.
급히 나오느라 '예의'는 안 챙겨 오셨나 봐요?
아니면 어디서 잃어버리셨어요?
돈을 주고 사는 거라면 하나 사서 갈 때 챙겨주고 싶었다.
그러는 본인은 아침에 세수하면서 거울도 안 보고 나왔나 보지?
'저 사람은 아니겠지? 설마, 아닐 거야, 아니겠지, 아니여야만 해...'
난 속으로만 울부짖었다고요.
내가 먼저 도착했던가 '때문에 씨'가 와서 기다리고 있었던가?
그 기억은 확실하지 않지만 저 마음은 첫사랑보다도 더 잘 간직돼 있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보다도 더 대단한 신인류를 발견한 듯한 체험을 했다.
외모를 평가하는 게 아니다.
그와 나는 고향이 수평으로 서로 반대쪽이다.
모든 문화와 언어와 생활 같은 것들이 너무도 달랐다.
그 지역 사람을 처음 만나서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중 단연 으뜸인 것이 있었으니 말투였다.
그냥 외모도 타 지역 사람 같았다.
무슨 말인고 하니 내가 살던 곳에서는 못 보던 외모였다.
그나마 우리 집 남자들, 아빠, 오빠 둘, 남동생을 떠올려 봐도 뭔가 달랐다.
무슨 말로 부연설명을 해도 대체 무슨 소리인지 이해할 수 없겠지만 사실이 그러했다.
아마 공시생 신분을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러는 나도 남을 보기 전에 나를 먼저 돌아봤어야 했다.
얼떨결에 나도
"이렇게 생긴 사람 처음 봐요."
해버렸다.
철인 3종 경기보다도 더 험난한 여정을 거쳐 두 공시생은 세상 밖으로 나왔다.
우중충한 하늘 아래 약속 장소는 산이었다.
내가 산에 가고 싶었다.
단지 그 이유뿐이다.
공시생 생활을 하느라 막바지에는 인권도 없이 살았던지라 갑자기 산에 가고 싶어서 인근 시의 산으로 약속 장소를 정했다. 내 거주지 근처로 오라는 제안에 그도 이의제기를 하지 않았다.
다짜고짜 외간 남자를 산으로 불러들여서 어쩌자는 것인가.
탁 트인 곳으로 여행을 떠나고 싶었다.
흉흉한 요지경 세상에 혼자 하는 여행은 자신 없었으므로 의욕만 앞섰으므로 멀리 나가지도 못했다.
의욕은 넘쳤으나 의지는 한참이나 부족했다.
산행하는 동안 그는 훌륭한 말동무가 되어 줄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엉뚱한 소리만 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보통은 초대하는 쪽이 음식은 대접하는 거라고 여겼다.
워낙 식당밥을 안 먹는 편이라 식당이 어디 있는지 뭘 대접해야 할지도 모르겠어서 도시락으로 김밥을 싸갔다.
생각해 보면 나도 주책이지.
시내에 천국이 여기저기 널렸는데 가엾은 어린양을 왜 천국으로 인도하지 않았던고?
내가 저런 소리나 듣자고 아침부터 김밥을 말았단 말인가.
오전 11시 정도가 아마 약속 시간이었을 것이다.
산에는 가고 싶고 그렇다고 밥을 사 먹고 가자니 이른 것 같고 산행하다가 배고파서 다시 내려오고 싶지는 않아서 나름 머리를 굴린 게 김밥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외출할 때 도시락 싸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한다.
그렇다고 맛까지 보장한다는 말은 절대 아니다.
그동안 장수생으로서 마땅히 억눌러야 했던 외출에의 욕구를 김밥으로 승화시켰다.
순전히 내 편의를 위해서 준비한 도시락인데 그는
"세상에, 나 주려고 김밥까지 싼 거예요? 정말 대단하다. 너무 고마워요."
김치는 챙겨가지도 않았건만 그가 알아서 김치 국물을 벌컥 들이켰다.
그래, 김밥만 먹으면 목멜라.
마셔, 마셔 어여 쭉 마시게.
그래도 김칫국물 챙겨 오는 센스는 있는 사람이네.
'내가 먹고 싶어서 나 먹으려고 싼 건데?'
그는 넘겨짚기 선수였다.
뜻밖의 숨겨진 재능을 발견하는 순간이다.
올림픽 경기 종목에 '넘겨짚기'가 누락되어 있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뭔가 점심이라도 대접은 해야겠는데 내가 뭘 알아야지, 평소 음식이라곤 뭘 먹어도 맛있는 줄도 잘 모르겠고 맛집을 찾아다니는 성격도 아니었고 크게 식탐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어디까지나 나 편하자고 이것저것 신경 쓰기 싫어 한 행동에 그는 감동씩이나 한 듯 보였다.
'어? 이런 반응 기대하고 김밥 싼 거 아닌데.'
그러나, 때론 침묵도 필요한 법이다.
"고시원에서 맨날 라면 같은 것만 대충 먹고 사니까 질렸는데 임자 씨 덕분에 이렇게 맛있는 도시락도 다 먹어보네요. 진짜 고마워요."
이렇게 말하는 이에게
"식당 알아보기도 귀찮고 이게 제일 만만해서 대충 쌌어요."
이렇게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진심으로 나는 그때 식당 검색 같은 것은 귀찮았다.
금방이라도 장맛비가 쏟아질 것 같은 먹구름 아래 남의 속도 모르고 그의 얼굴이 해사했다.
김밥 한 줄에 저렇게도 안색이 밝아질 수 있는 사람이 다 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애초에 장마기간에 만나자고 합의 봤던 게 화근이었나?
우울한 여름 하늘 아래 그가 잠깐 짠하게도 보였다.
나름 가장 멀쩡한(아마도 최상의) 옷으로 갖춰 입고 왔겠지만 (내 눈에만) 후줄근한 그의 행색에 잔뜩 찡그린 날씨가 열과 성을 다해 도운 결과 그가 더욱 안쓰럽게 보였다.
뒤늦게 북태평양 기단, 오츠크 해 기단 혹은 시베리아 기단을 강력히 규탄하기에 이르렀다.
장마전선은 느닷없는 순간에 '측은지심'을 우러나오게 하는 묘한 힘이 있다는 것을 이전에는 알지 못했다.
타 지역에서 자취하고 있는 그와 동갑인 남동생 생각이 왜 하필이면 그때 났던고?
어느새 나의 왼 손이 내 몫의 김밥까지 그의 앞으로 밀어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