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그의 만담에서 저를 구하소서.
세헤라자데의 환생을 보았다.
22. 10. 9.
< 사진 임자 = 글임자 >
"엄마가 병원에 입원하셔서 그동안 정신이 없었어요. 병원에 있었거든요. 연락 많이 기다렸죠?"
얼마만이었을까?
연락이 끊긴 지 2주 정도 지났으려나?
그래, 불미스러운 사건에 연루되어 어디 다녀온 건 아니라니 그나마 다행이로군. 까딱 잘못했다가는 나까지 휘말릴 뻔했지 뭐야.
내가 연락을 기다렸던가.
'요즘 연락이 없네?'
궁금한 이런 마음도 기다림에 속하는 것일까?
가족 중에 마땅히 병원에 상주할 사람이 없어 무직자인 아들이 불려 갔다고 했다.
공시생 시절 걸핏하면 농번기에 동원되고 심지어 한창 공부중일 때도 부모님 부부 동반 계모임에 집을 비우게 되자 단지' 소 밥을 주기 위해' 집에 호출당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부인하고 싶지만 닮았다.
슬프지만, 처지가 비슷한 공시생 출신들이었다.
생각지도 않게 '때문에 씨'의 가족사를 듣게 되었다.
큰누나는 자신과 10살도 더 터울이 있고 이미 결혼을 한 상태이고 둘째 누나는 사정상 안된다고 했던 것 같고, 남동생은 아직 학생이라고 했던가?
'뜬금없는 고백'의 '원형'이다.
그는 지나치게 친절한 사람이었다.
묻지도 않았는데 시시콜콜한 가족 얘기를 한참이나 늘어놓았다.
갑자기 이야기 할머니라도 된 것이란 말인가.
그러나 그는 결코 이야기 할머니 같은 사람은 될 수 없을 것이다,라고 장담했다.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이야기에 전혀 귀를 기울이게 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내가 궁금해하지도 않았을뿐더러 그 상황에 나올 얘기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설사 기적적으로 이야기 할머니가 되었다 하더라도 이야기를 듣기 위해 그의 주위에 바짝 다가앉는 어린이는 아마도 없을 것이었다.
웃던 어린이도 울려버릴 듯한 치명적인 매력의 소유자다, 그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지.
나도 멀찌감치 떨어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 순간 차라리 아예 상관없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주여,
저를 그의 만담에 희생양이 되게 하지 마시고,
마옵시며,
마옵소서...
천일야화의 세헤라자데 공주도 울고 갈 이야기와 이야기로 밤을 새울 것만 같았다.
공무원 시험에 '작문 과목'이 있었다면 그는 또 한 번 과락을 면치 못하였으리라 잠깐 생각했다.
때에 맞는 이야기도 전혀 아니었고, 논점도 흐렸으며 취지 또한 불분명했다.
한마디로 나는 들어도 그만 안 들어도 그만인 '남의 가정사'였다.
느닷없는 가족 얘기도 당황스러운 마당에
"사실 아버지가 연세가 많으시거든요."
라며 갑자기 화제를 바꾸었다.
아버지니까 연세가 당연히 많으시겠지, 지금 이 상황에 또 무슨 뜬금없는 소리람?
'뜬금없는 고백'의 '비교급'이다.
남의 아버지 연세가 많으시건 적으시건 나랑 무슨 상관인데?
"엄마랑은 거의 10 살 정도 차이가 나요."
하마터면
"어마? 우리 엄마도 아빠랑 거의 열 살 정도 차이 나는데."
이렇게 맞장구 칠 뻔했다.
침착하자, 말려들지 말자.
남의 가족 이야기일 뿐이야.
저 사람은 남이야.
내 부모님 연세나 신경 쓰자.
남의 가족 이야기야.
남의 가족 이야기는 듣기만 하는 거야.
함부로 맞장구치는 거 아니야.
"사실 제가 늦둥이인 셈이거든요."
늦둥이든, 이른둥이든, 설사 그가 '해방둥이'라 하더라도 나와 별개의 일이었다.
"둘째 누나가 임자 씨랑 동갑인 건 전에 얘기했었죠? 첫째 누나 낳고 한동안 자식이 안 생겼대요. 나중엔 자식이 넷이나 되긴 했지만요."
또 하마터면
"세상에 만상에, 어쩜, 우리 집도 4남매예요!"
이럴 뻔했다.
무사히 위기를 넘겼다.
그런데 잠깐만요, 지금 그 얘기는 얼굴도 모르는 사이에, 알게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사이에 할 종류의 것은 아닌 것 같은데요?
아마도 그동안의 고된 병원 생활에 다시 장수생 모드로 돌아가버렸나 보다.
돌발 상황! 위기 경보 발생!
사리분별 능력 현저히 저하, 일상적인 대화 불가능, 상황에 맞는 대화 주제 선정의 실패...
연민에의 호소, 동정에의 호소? 뭐더라? 아니 그런 거 다 필요 없고 나랑은 그냥 아무 상관없는 먼 나라 이웃나라 가족사일 뿐이다.
"아버지가 연세가 많으셔서 집에서는 저보고 결혼을 일찍 하라고 하세요. 우리 언제 한 번 만나야죠?"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뜬금없는 고백'의 '최상급'이다.
그는 며칠 간의 안정이 절대적으로 필요해 보였다.
지난번에 쪽지 오갈 때까지는 그래도 저 지경까지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어쩌다가 사람이 저렇게까지 못쓰게 됐누?
"근데 어머님 편찮으시다면서 더 같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괜찮아요. 다음 주 어때요?"
세상에는 두 종류의 아들이 있다.
아픈 어머니를 위해 곁을 지키는 아들(혹은 쾌차하실 때까지라도 다른 일을 미루는 아들)과 얼굴도 모르는 사람에게 별의별 가족 얘기를 하며 만남을 빙자하여 그 곁으로 다가서려는 아들.
어머니의 병환도 아들의 마음속 지하 깊은 곳에 자리한 '만남의 욕구'를 이기지는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