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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임자 Apr 07. 2024

이 영감탱이를 어쩌면 좋지?

그 영감탱이의 오지랖

2024. 4. 5.

<사진 임자 = 글임자 >


"세상에, 흰머리 좀 봐. 완전 하얗다. 할머니다 할머니야. 어떡해!"


이 인간이 정말 보자 보자 하니까 못하는 소리가 없네.

아니, 저 소리만 잘하시네.


마흔을 넘기니 정말 눈에 띄게 흰머리가 늘었다.

전체적으로 하얀 건 아니지만 관자놀이 쪽에 집중돼서 정말 그쪽만 보면 제법 하얗다.(고 나도 진작에 인정하고 있는 중이다)

거의 평생을 앞 머리 없이 살았지만 최근 몇 년 동안은 앞머리를 길렀는데 외출할 때는 그냥 모자를 즐겨 쓰는 편이라 평소에는 별로 의식도 못하고 살았다. 그리고 철없고 어릴 때나 시도 때도 없이 거울을 들여다봤지 이젠 거울 볼 일도 없다. 가족 나들이 때가 아니면, 아이들 학교 방문이 아니면 화장을 하지 않으니 중간 점검을 할 일도 없어졌고 거울을 보는 일이 우담바라꽃 보는 일보다도 더 진귀한 일이 되었다, 내게는.

그런데, 나는  별로 개의치 않는데, 나이가 들었으니 흰머리가 나는 것은 당연한 이치라고 생각해 왔는데, 그깟 흰머리 나는 거야 자연의 섭리인데, 흰머리가 나든 검은 머리가 나든 빨간 머리가 나든, 머리에 뿔만 안 나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인데, 난데없이 그 양반이 저렇게 나왔다.

"얘들아, 엄마 머리 좀 봐. 무슨 흰머리가 저렇게 많지? 너무 심한데? 왜 저래? 할머니 같지 않아?"

왜 가만히 있는 아이들까지 선동하려 드느냔 말이다.

"어? 진짜네. 엄마 흰머리 있다."

아이들은 내게 바짝 붙어 앉아 그 현장(?)을 확인했다.

"원래 지금쯤이면 흰머리가 나는 건가? 근데 이렇게 심하게 많이 나나? 당신 그 정도 나이는 아니잖아? 하긴 어떻게 나이를 속이겠어. 가는 세월을 어떻게 막겠어. 와, 근데 진짜 흰머리가 많긴 많다."

저 말을 몇 년 전부터 들어왔다.

그러든지 말든지 내가 별로 상관을 하지 않으니 듣고 흘려버렸다.

"염색 좀 해. 염색만 해도 사람이 젊어 보이는데 왜 그렇게 살아? 머리만 까매도 몇 년은 젊어 보이는데 왜 염색을 안 해? 염색하는 게 귀찮아? 그 정도도 못해? 도대체 왜 염색을 안 하는 거야? 흰머리 있으니까 사람이 완전 나이 들어 보이잖아."

나는 20년 전 철없을 때 몇 번 염색을 해 봤고 그런 쪽으로는 별로 관심이 없어서 염색을 하지 않았다. 남들은 트리트먼트를 쓴다 컨디셔너를 쓴다 영양제를 쓴다 어쩐다 저쩐다 하지만 그런 일에 나는 관심이 없다. 관심이 없으니 흰머리가 나든 말든 상관하지 않는 것뿐이다. 그리고 주인인 내가 괜찮은데 불편한 것도 없고 굳이 염색을 꼭 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데 옆에 있는 저 인간이 더 호들갑이다.

한 번씩 아이들 학교에 방문해야 할 일이 생기면 앞머리를 내리고 옆으로 살짝 어찌해 주면 흰머리가 살짝 보여도 완전한 백발은 아니니까 그 정도는 괜찮다고 살고 있다. 그리고 흰머리 날 때가 돼서 난 것이니 그냥 흰머리가 나면 난 데로 사는 것이다. 내게 흰머리가 났다고 해서 세계 경제가 휘청거리거나 인류 편화가 깨지거나 한다는 일 같은 건 결코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흰머리에 염색하는 일 말고도 더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일이 내게 얼마나 많은데?

그러니까, 그 양반 혼자만 괜히 심란한 거다.

남의 머리가 흰머리든 빨강 머리든 도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요즘 한가하신가 보지?

내 흰머리에 오지랖을 다 떨고 말이다.

하긴 그 양반은 본인 흰머리에도 아주 예민하셨다.

"이제 흰머리가 좀 보인다."

언젠가 이발을 해 주다가 내가 말했다.

"어? 진짜? 어떡하지? 진짜 흰머리 났어?"

그럼 진짜로 나지 가짜로 났을까?

내가 한 말에 그 양반은 당장 염색 샴푸를 8통이나 주문하셨다.

물론 한 두 번 쓰다가 방치됐고, 이젠 애물단지가 된 지 오래다.

물론 나도 그 양반이 그럴 줄 알았다, 기원전 5,000년 경에.

뭘 진득하게 하는 법이 없으시니까.


"진짜 당신 너무 할머니 같아. 벌써 할머니가 됐어, 어떡해. 너무 심한데?"

이 인간 정말 말을 해도 꼭 본전도 못 찾을 소리만 골라서 하시는 놀라운 재주가 있으시다.

더 이상 듣고만 있지 않겠어.

내 흰머리 건들지 마.

오래간만에 입 좀 풀어 볼까?


"내가 흰머리가 나든 빠지든 무슨 상관이야? 왜 자꾸 염색해라 마라야? 설마 같이 다닐 때 남들이 내 흰머리 쳐다볼까 봐 그래? 걱정 마. 그럴 일 없어. 누가 같이 다녀 준대? 내 흰머리 걱정하지 말고 본인 배나 걱정해. 그게 배야 산이야? 도대체 어떻게 하면 그렇게 배가 나올 수 있어? 본인이 애 낳았어? 애는 내가 낳았는데 왜 댁이 배가 나와 있어? 산달이 내일모레네. 그게 다 내장 지방이라고. 흰머리에는 내장 지방도 없어. 하지만 그 배에는 내장지방만 꽉 차 있을 걸? 남의 흰머리는 신경 끄고 본인 내장지방 관리나 잘하시라고! 저 배만 보면 정말. 흰머리는 염색이라도 할 수 있지. 그 배는 어쩔 건데? 지방흡입이라도 할 거야? 그리고 나는 최소한 정수리가 비어 있지는 않아. 흰머리는 났지만 머리가 텅 비지는 않았다고. 본인 머리 좀 보고 얘기해. 이발할 때마다 정수리가 얼마나 훤한지 눈이 부셔서 못살겠네. 지금 남 걱정할 때가 아니라고 이 인간아. 흰머리 조금 났다고 할머니라고? 내가 할머니면 댁은 뭐겠어? 적당히 해, 이 영감탱이야!!! 내가 왜 이렇게 흰머리가 많이 났겠어? 누구 때문에 스트레스받아서 이렇게 된 거 아니야! 얼마나 속을 썩이는지 그 사람이 누군지는 잘 아시겠지? 누가 누구한테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정말. 제발 가만히 있기나 해 이 영감탱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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