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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식량으로 국을 끓여 먹고

내가 면장을 못 하는 이유

by 글임자
2024. 8. 20.

< 사진 임자 = 글임자 >


"이건 비빔밥이 아니잖아, 엄마."

"응, '비빔국'이야."

"그게 뭐야. 세상에 비빔국이란 것도 있어?"

"만들면 있지.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비상 상황엔 이것저것 따질 시간도 없어."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비빔밥을 비빔국으로 승화시켜 버린 날, 어쩌면 망쳐버린 날, 정말 비상 상황이었다.


"당신 이거 먹어."

아침에 출근을 하려다 말고 그 양반이 가방에서 주섬주섬 뭔가 꺼냈다.

부스럭 부스럭거리면서 세 봉다리나 말이다.

이게 웬 전투식량이냐.

"을지훈련한다고 밤새 비상 근무하고 전투식량 얻어 온 거야?"

"응."

"그걸 또 챙겨왔어?'

"아무튼 당신 먹으라고."

이렇게나 살뜰한 양반이라니!

어디 보자, 건빵 두 봉다리, 소고기 고추장 비빔밥 한 봉다리 자그마치 세 봉다리씩이나 되잖아?

나 하나, 딸 하나, 아들 하나 마침 딱 맞네, 공평하게.

"얘들아, 전투 식량 먹자. 비상 상황이라고 생각하고 먹어 보자."

"어디서 났어?"

"아빠가 아침에 주고 갔어."

"그래?"

"아마 그렇게 맛이 있지는 않을 거야."

"에이, 엄마 괜찮아. 맛있을 거야."

"아니야, 별로 기대는 하지 마."

생긴 것도 그렇고 딱히 맛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철없는 어린것들은 그래도 마냥 좋아하는 것 같았다.

"엄마, 전투식량이잖아. 맛이 없으면 어때? 어차피 전투식량은 맛으로 먹는 게 아니야."

우리 아드님, 언제 군대라도 다녀오셨나?

이참에 입대라도 해 주시면 좋겠다.

어차피 전투 식량이니까 그냥 그런 줄 알고 먹어야 한다는 그 일급비밀을 어떻게 알았담?

"그래, 우리 아들 말이 맞다. 비상시에 먹는 거니까 맛이 무슨 상관이야. 일단 먹을 수 있다는 게 중요한 거지."

"한 번 먹어 보자. 엄마가 한 번 만들어 볼게."

하교한 아이들에게 전리품 같은 그 전투식량을 선보이자 그들의 눈은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평소에 바깥음식을 거의 먹지 않는(내가 잘 사주지 않는 편이라) 아이들이라 전투식량 하나에도 그저 기대만발인 우리 집 어린이들.

남매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나는 곧바로 조리에 돌입했다.

한글만 알면 만들 수 있게 만들어진 것이었다.

조리랄 것도 없이 세상 단순했다.

뜨거운 물을 붓고 15분만 기다리면 된다고 했다.

그리고 고추장 소스와 참기름을 섞어주면 끝이라고 했다.

전투식량을 이런 식으로도 만들 수 있다니, 군대 같은 건 가 보지도 않았고, 갈 일도 없었고, 군대 간 남자친구 면회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나도 마냥 신기했다.

일단 물 붓는 선까지 끓는 물을 부어주라고 했겠다?

친절하기도 하셔라.

못 알아들을까 봐, 나처럼 어리바리한 국민을 위해 봉다리 안쪽 몇 군데다 '물 붓는 선'이라고 여러 군데 표시를 해뒀다.

그런데 물이 좀 많이 들어가는 것 같다. 표시된 선이 너무 위쪽까지 올라와 있었다.

좀 이상하긴 했지만 일단 그 선이 맞다고 생각하고 물을 들이부었다.

정말 물이 많이 들어가서 입구를 막아야 하는데 잘 닫히지 않을 지경이었다.

분명히 비빔밥이라고 했는데 이렇게나 물이 많이 들어가나 싶었지만, 그래도 그런가 보다 했다.

밥알이 딱딱하니까 불리려면 그 정도는 부어 줘야 하나 보다 했다.

15분 후, 입구를 열어 보니 그래도 물이 흥건했다. 밥알이 불려지고도 남을 시간인데, 참 이상하다.

이래 가지고는 비빔밥이 되기 힘들 것 같다.

아마도 비빔죽이 되어버릴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5분을 더 기다렸다.

그래도 물은 여전히 윗부분에 넘실거렸다.

뭔가 잘못된 게 틀림없어.

하지만 난 물을 넣으라는 만큼 넣었는걸?

일단 그릇에 옮겨 담았다.

그리고 나는 이내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물 붓는 선'은 저기 저 지하에 표시돼 있었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아니, 고백하자면 내가 자세히 확인도 해 보지 않고) 그 표시선(으로 추정되는) 맨 윗부분을 최대선인 줄 알고 거기에 맞춰 물을 들이부었던 거다

화살표는 아래에 표시돼 있었다.


"엄마, 비빔밥이라고 하지 않았어? 근데 왜 국을 줘?"

딸도 눈치도 빠르게 내게 물었다.

"응, 엄마가 착각하고 물을 너무 많이 부어버렸어."

"아이고, 엄마."

"엄마가 확인을 잘 안 해서 그렇게 됐어. 그냥 먹자. 전시 상황이라고 생각해. 전쟁 나 봐. 비빔밥, 비빔국 그런 거 따질 시간도 없어. 일단 먹는 게 중요하지. 나무껍질 벗겨 먹는 것보다는 낫잖아. 아마 풀뿌리를 캐서 죽 끓여 먹는 것보다는 맛있을 거야. 안 그래?"

"그래. 그 말은 맞네."

다시 한번 남매에게 불신을 얻고, 퇴근한 그 양반에게도 양심 고백을 하기에 이르렀다.

"아빠, 엄마가 전투식량으로 국 끓여줬어."

남매가 제 아빠에게 쪼르르 달려가 나의 만행을 알렸다.

"어? 비빔밥 아니었어?"

그 양반이 내게 확인했다.

"비빔밥 맞아."

나는 대답했다.

"근데 무슨 국을 먹었다는 거야?"

"내가 착각하고 물을 너무 많이 부어서 국이 돼 버렸어. 물 붓는 선을 착각해서."

"하여튼 허술해."

"그럴 수도 있는 거지 뭐. 알아야 면장을 하지. 그래서 내가 면장을 못하나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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