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신신당부를 하고 미리미리 대비를 하라고 해도 하여튼 내 말만 안 듣는 어떤 성인 남성이 우리 집에 거주하고 계신다.
"이번에 하루 밤새워야 돼."
그 양반은 다음 주 스케줄을 내게 슬쩍 흘려주었다.
물론 그 말을 듣고 나는 뛸 듯이 기뻤지만 너무 좋아하는 티를 내면 아니 된다.
차마 눈 뜨고는 못 봐줄 발연기라도 다소 걱정스러운 얼굴로 '고생하겠다'는 식의 감정 표현을 함과 동시에 피할 수 없는 그의 운명적인 노고를 안쓰러워해야만 한다.
밤새 비상 근무 한다는 게 여간 힘든 게 아닌데 고생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매년 이 시기에 반드시 치러야만 하는 일이니 성실히 임해야 한다. 비상근무 체제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그들대로, 다른 사람들은 각자 나름대로 말이다. 연습은 하지만 그런 비상 상황이 평생 발생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나저나 정말 이게 웬 횡재람?
생각해 보니 을지훈련할 시기가 되기도 했다.
"보니까 을지훈련한다고 많이 걸려있긴 하더라."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을지훈련-> 하루 밤샘 근무-> 외박(이라기보다 합법적인 근무)-> 그렇다면 하루는 그 양반이 집에 없다는 소리잖아?
백 년 전에 내가 근무할 때는 을지훈련 기간에 직접 어떻게 하는 것도 아니고 담당자도 아니었지만, 겨우 평소보다 더 일찍 출근하고 복무에 더 신경 쓰라는 지시에 괜히 신경이 쓰이고 하는 것 없이 부담스러웠는데 이젠 비상근무 할 일도 없어지니 그 양반의 을지훈련 기간이 다가오면 그저 반갑다.(고 진심으로 느끼는 내 마음을 그 양반은 제발 영영 모르고 지나가기를, 그가 정년퇴직을 할 때까지.)
"그럼 피곤하겠다. 미리미리 푹 쉬어 둬. (평소에도 아무것도 안 했지만)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냥 방에만 있어. 내가 밥 때 되면 그때만 부를게. 종 치면 그때 나와.)"
나 같은 경우는 하루 밤을 새우면(밤을 새우기도 힘들긴 하지만) 일주일 넘게 고생을 하는 스타일이라 중요한 일을 앞두고 그 양반도 최대한 체력을 아껴도라는 의미에서 한 말이다.
물론 다른 꿍꿍이가 있긴 했지만 그런 건 굳이 밝힐 필요는 없겠지?
꿍꿍이라고 해 봤자 별거 없다.
그저 직장인이 하루 집을 비운다는 그 사실에 생각만으로도 기뻐 지레 혼자만 호들갑을 떠는 것이다.
지난번 1박 2일 워크숍이 있었을 때 최대한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겠다던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한용운의 '님의 침묵' 중)'를 남몰래했건만, 컨디션이 안 좋은 상황에서도 오만 가지 일을 다 하고 드러누워버렸던 과거를 떠올리며 이번에야말로 다시 마음을 고쳐먹기로 했다.
물론 그 양반이 퇴근하고 집에 돌아온다고 해서 정말 뭘 어떻게 하는 것은 아니지만 평소 그 양반이 집에 있을 때는 왠지 손가락 10개, 발가락 10개까지 다 까딱하는 느낌이랄까? 그래서 나는 그 양반이 없는 틈만 노려서 최대한 안일하게 살아보기로 매번 다짐씩이나 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항상 나의 예상 시나리오를 한참 빗나갔고 말이다.
다시 한번 노려보자, 그 무엇을.
그러나 나는 향기롭고 꽃다운 '을지훈련'이라는 단어에만 정신이 팔려 다른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리석게도.
그리고 이내 듣고야 말았다.
"하루 밤새니까 다음날은 대체휴무야."
이런!
내가 그걸 깜빡했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다니.
여태 우리 집에서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사람은 단연코 그 양반이라고 줄기차게 밀고 나갔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