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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기쁨 나의 번뇌
수세미와 고무장갑이었더라면
설거지 할 수 없는 것들로만 모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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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임자
Dec 27. 2024
2024. 12. 25.
< 사진 임자 = 글임자 >
"엄마, 누나 방에 들어가지 마. 내가 멋진 걸 사 왔거든. 아마 깜짝 놀랄 거야."
아드님이 드디어 컴백하셨다.
학교에서 바자회를 막 마치고 싱글벙글하며 혼자만 신나셨다.
분명 혼자만 신난 게 맞다.
적어도 나는 신나지 않았다.
아드님 말씀이 맞다.
나는 아마 깜짝 놀랄 것이다.
깜짝 놀랄 예정이었다.
깜짝 놀라지 않고는 못 배길 그런 현실이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우리 아들, 제발 인형만은 참아 줘. 이미 집에 많이 있잖아. 응?"
바자회가 있던 날 아침 아드님게 신신당부했다.
물론 나의 간절한 부탁이 어느 정도 아드님의 구매 의지에 영향을 미칠지는 모르겠으나, 아마도 매우 미미하겠지만 그래도 해 보는 데까지는 해 볼 생각이었다.
"엄마. 기다리고 있어. 내가 아주 멋진 걸로 사 올 테니까."
그래, 멋진 거라.
최소한 인형은 아니시겠지.
솔직히 못 미더웠지만 그래도 설마설마했다.
그리고,
역시나,
설마가 사람 잡았다.
"엄마. 세상에 OO가 인형을 7개나 사 왔대!"
딸이 특종을 전하듯 내게 급히 전달했다.
"뭐? 설마! 거짓말!"
나는 정말 믿을 수가 없었다.
이와 동시에 아드님이 제 누나 방에서 뭔가 주섬주섬 꺼내더니 하나씩 내게 선보이기 시작했다.
"엄마, 짜잔~"
드디어 시작하셨다.
"이건 귀여워서 샀어."
과연 그것은 귀여웠던가?
"이건 내가 좋아하는 거라 샀어."
네가 언제부터 그걸 좋아했는데?
"이건 뭔지 모르지만 사고 싶어서 샀어."
이왕이면 알고 샀더라면 더 좋았을 것을.
"이건 그거잖아. 오징어 게임. 내가 하나 샀지."
오징어고 꼴뚜기고 나랑은 아무 상관없잖니?
"이건 미키 마우스잖아. 우리 집에 이건 없잖아."
솔직히 없는 게 더 많지.
당연하지. 우리 집은 인형가게가 아닌걸.
"이건 헬로키티. 예쁘지 엄마? 그래서 샀지."
글쎄다.
난 너랑은 취향이 달라서 말이지.
"그리고 이건 엄마 생각이 나서 산 거야. 엄마처럼 이쁘고 좋잖아?"
왜 그 인형을 보고 엄마를 생각하셨을꼬?
도무지 이해는 되지 않는다.
"우리 아들, 그럼 엄마만 있으면 되는 거 아니야? 인형은 없어도 될 것 같은데?"
"에이, 엄마. 그래도 내가 엄마를 생각하면서 산 거야."
그러니까 글쎄 왜 거기서 엄마 생각을 하셨냐는 말이지.
"뭐야? 그럼 정말 7개나 산 거야? 진짜로?"
그렇다.
딸의 제보대로 아드님은 인형을 7개나 마련하셨다.
"그래서 오늘 만원이나 썼대."
"그래, 좋은 일 했다."
바자회에서 생긴 수익금은 어디에 기부를 한다고 했다.
그런데 꼭 인형이어야만 했을까?
"너는 그렇다고 인형만 7개나 샀냐?"
딸이 제 동생을 타박했다.
그래, 역시 우리 딸이야.
우리 딸은 뭔가 다르겠지?
"엄마, 내 친구는 고무장갑이랑 수세미를 많이 사더라. 엄마 갖다 드린다고."
이건 복선이겠지?
자신도 그 비슷한 것을 사 왔다는 암시렸다?
"그랬어? 엄마 갖다 드리면 좋지.(=최소한 인형보다는 낫겠지 엄마 입장에서는.)"
"그런가?"
"그럼!(=인형으로 설거지를 할 수는 없잖니?)"
"자, 이제 내 차례야. 나는 뭘 샀냐면..."
그래, 우리 딸. 어서 바밍아웃해 보렴.
이 엄마 몫으로 수세미 한 장 정도는 떨어질 콩고물이 있겠지?
최소한 인형 같은 건 아니겠지?
그러나,
그 동생에 그 누나였다.
딸도 샀다, 인형을.
그것도 두 개나.
"엄마, 난 그래도 좀 작은 인형으로 샀어!"
하긴 바자회에서 살 수 있는 게 무엇이 있을까?
어린이들이 집문서를 주고받겠는가 논, 밭을 사고팔겠는가.
참으로 어린이다운 거래가 아닐 수 없다.
지극히 어린이다운 바지회의 결말에 나는 그만 심란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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