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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 때는 엑스레이를 찍어요

님아, 그 숲에는 갈 수 없소

by 글임자
2025. 7. 21.

<사진 임자 = 글임자 >


"여보, 나 금요일에 휴가야."

"그럼 낼모레잖아."

"응. 하루 쉬려고."

"근데 벌써 보고해?"


이렇게나 계획적인 양반이라니!

겨우, 달랑 며칠 전에 이 중요하고도 귀하고도 느닷없는 소식을 알려오면 어쩌자는 거지?


어제 퇴근을 한 그 양반은 내게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나보고 언제 휴가 갈 거냐고 물어봐서 그냥 금요일 하루 쉰다고 했어. 우리 어디 갈까?"

가긴 어딜 가?

갈 거면 혼자만 가!

다음 주도 아니고 이번 주 금요일이면 내일모렌데 벌써부터 이러면 어쩌라고?

(요즘 몸이 안 좋아서 최대한 아무것도 안 하고 조신하게 있으려고 했는데 그 양반은 기어코 나를 일으켜 세워 글을 발행하게 만드셨다.)

"얘들아, 우리 어디 갈까?"

그 양반은 철없는 어린것들을 공략했다.

"아빠, 자고로 여행은 여행의 맛이 있으니까 어디 괜찮은 데로!"

딸은 벌써 보따리를 쌀 기세다.

"여보, 우리 어디 갈까?"

난 빠지고 싶은데 기어코 나를 끌어들이셨다.

"난 아무 데도 안 가고 싶어. 생각만 해도 힘들어. 나 여름에 기운 없는 거 알잖아?"

이 불볕더위에 집 밖에도 나가기 싫은 사람한테, 가자니? 다짜고짜 어디로?

"우리 어디 계곡 가서 발에 물 담그고 있을까?"

그 양반은 혼자 신나셨다.(고, 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그게 참 거슬렸다.)

"뭐 하러 더운데 밖에까지 나가서 발 담그고 있어? 집에서 세숫대야에 발 담그고 있으면 되지."

나는 온 진심을 다해 말했다.

정말 그러고 싶었다.

그럴 수 없다면, 나를 제외한 나머지 세 멤버만 이 집을 비워줬으면 좋겠다, 진심으로.

"에이, 엄마, 그래도 여행 가는 거랑 다르지."

딸은 완전히 제 아빠 편이었다.

"지금 얼마나 더운지 알아? 너희는 집에서 가만히 에어컨 바람만 쐬고 있으니까 잘 모르지? 엄만 시장도 가고 도서관도 가고 일도 보고 하는데 진짜 더워. 이렇게 더운데 어떻게 여행을 가?"

제발 나는 빼 줬으면 좋겠다.

"우리 거기 갈까? 숲 속의 나무집."

갑자기 그 양반이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 듯이 불쑥 말했다.

"아빠, 거기 좋다. 가자, "

딸은 숲 속의 집이든, 땅 속의 집이든 우리 집만 아니면 어디든 상관없다는 말투였다.(고 또 지극히 내 마음대로만 생각했다.)

"그 집에서 우리 오라고 하겠어? 당장 내일모레인데 빈자리가 있겠냐고?"

몇 년 전 지리산 쪽에 있는 숲 속의 집(인가 비슷한 그런 이름이었는데 정확히는 모르겠다.)에 간 적이 있었는데 모두들 좋아해서(좋아했다고 믿었다.) 그다음 해에 또 갔었다. 나도 시끌벅적한 곳이나 휘황찬란한 곳보다는 그런 조용한 곳이 좋아서 그때는 군말 않고 따라나섰었다.

"알아보면 되지. 안 됨 말고."

그 양반은, 그러니까 좀 그런 편이다.

아님 말고, 이런 식이다.

어쩔 땐 귀한 휴가를 쓰면서 아무렇게나 시간을 보내는 것 같아 나는 그게 좀 못마땅할 때가 있다.(솔직히 많다, 매우 많다고 그 양반이 없는 자리에서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그 점뿐만이 아니라 여러 면에서 어쩔 땐 그 양반 자체가 무조건 못마땅할 때가 더러 있음을 소심하게 밝히는 바이다.)

"이왕 휴가 가려면 미리 계획했다가 진짜 가고 싶은 데로 가면 좋잖아. 왜 그렇게 항상 충동적이야?"

나는 날씨가 덥고 힘들다는 핑계로 적극적으로 동참하지는 않겠다고 밝혔으면서도 할 말은 다 했다.

정말 생각하면 좀 아깝다.

급기야 내가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얘들아, 좋은 방법이 있어. 그냥 마트 가서 맛있는 음식 잔뜩 사 와서 금요일부터 에어컨 틀고 내내 집에서 책이나 보고 놀자. 지리산 영상 틀어 놓고, 어때? 나가서 더위 먹을 일도 없고, 아빠가 힘들게 운전할 일도 없고 얼마나 좋아?(난 이렇게 그 양반을 생각한다.)"

물론 외출할 때 나와 번갈아 가면서 운전할 때도 있지만 거의 대부분은 그 양반이 운전을 하므로 이 무더위에 뜨거운 도로 위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할(것으로 거의 확실시되는 ) 그 양반을 생각하면 없던 측은지심까지 생겨나는 것이다. 그보다도 내가 그런 운전은 하고 싶지 않다.

"우린 초가을쯤에 여행하든지 하기로 했잖아. 굳이 이 더운 날 여행 가야 돼?"

이것도 진작에 그 양반과 내가 합의 본 사항이다. 거의 매년 그런 식으로 지내왔다.


"어차피 급히 숙소 잡기도 힘들 것 같고, 아마 아빠는 금요일부터 3일 내내 집에만 있을 거다.(아마도 그 양반은 그걸 노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노스트라다무스만큼이나 나의 예언은 잘도 들어맞는다.(대개는 말이다.)

급히 휴가지를 찾으려니 마땅한 데도 없고, 예상에 없던 일이었으니 누구 하나 적극적으로 나서지도 않았다.

필시, 그 양반은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새나라의 직장인이 될 것 같다.

그것도 나쁘진 않다.

평소 일이 많아서 자정에 들어오기 일쑤니, 며칠 정도는 집에서 푹 쉬어도 좋을 일 아닌가.

다만,

(금요일 하루 내내 꼬질꼬질한 모습으로 방바닥에 엑스레이만 앞 뒤로 찍을 것 같은, 그럴 거라고 확신하는)네 거친 외모와 불안한 눈빛과, 그걸 지켜보는 나, 그건 아마도 전쟁 같은 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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