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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전, 오는 전

넌 이번 주도 내게 글감을 줬어!

by 글임자
2025. 8. 25.

< 사진 임자 = 글임자>

"누나가 미역국 끓여 온다고 해서 우리도 뭐 해 가야지, 그랬어."

느닷없이 어젯밤에 그 양반이 전화를 다 하셨다.

밤늦게까지 일한다더니 일하다 말고 뜬금없이 전 타령을 하면서 말이다.


"누나가 미역국 끓이는데 우리도 그냥 갈 수 없잖아."

뭐가 그리 급하다고 집에 와서 얘기하면 될 것을 다짜고짜 전화부터 해 놓고 일방적으로 통보한단 말인가.

그냥 갈 수도 있는 거 아닌가?

"간단하게 하면 되지."

그 양반은 말로만 다 하는 사람이다.

"누가? 댁이?"

본인이 한다는 말이겠지?

그러나 그 양반은 대답이 없었다.

"그래도 뭘 해 가야지. 뭘 할까?"

꼭 뭘 해야 하는 걸까?

"그냥 엄마가 고기 구워 먹자고 하시더라."

"그럼 그거 먹음 되지."

"그래도 생신인데 전 몇 가지 있어야지. 몇 가지만 간단하게 하면 되잖아?"

전생에 전 못 먹어서 죽은 구신이 환생하셨나?

"본인이 할 거지?"

또 그 양반은 대답이 없었다.

"누나가 미역국 한다고 하니까 나도 전이나 뭐 그런 거 해 간다고 했지."

"설마, 또 나섰어?"

"누나는 미역국 한다잖아."

자꾸 누나의 미역국이 반복되고 있었다.

누나는 누나고, 그건 누나 알아서 할 일이고, 누나는 엄마 생신이니까 미역국 끓여 드리고 싶은가 보지.

사실 미역국을 맛있게 끓이는 재주도 없는데 잘 됐다 싶긴 했다. 난 차라리 전하는 게 더 쉽다.

"간단히 당신이 전 좀 하면 되겠다. 그거 간단하잖아? 누나한테는 우리가 전 해 간다고 그렇게 말했어."

누구 맘대로?

이 양반이 정말 보자 보자 하니까 '같이 전 부칩시다.'도 아니고 나보고 일방적으로 전을 부치라고 하시네?

"왜 나한테 미리 상의도 안 하고 일방적으로 정해?

"우리가 전 서너 가지 해 간다고 했어. 무슨 전 하면 좋을까? 간단하게 산적하고 생선 전하고 또 뭐 할까?"

아니, 이 인간이 갈수록 태산일세?

산적? 생선 전? 그것도 간단하게?

"전 부치기가 그렇게 쉬운 줄 알아? 날도 더운데 전 부치라고? 왜 나한테 미리 말도 않고 마음대로 정하냐고?!"

"에어컨 틀고 하면 되잖아."

"에어컨만 틀면 다야? 그냥 전 하는 것도 쉬운 거 아닌데(아무래도 내가 그동안 너무 쉽게 전을 부쳐냈었나 보다. 사실 쉽게 하긴 했다. 순식간에 전 부쳐냈던 과보를 오늘날 이렇게 받는구나. 과연 정업난면이로다.) 이 더위에 전을 몇 가지나 부치라는 거야?"

그 양반은 다시 침묵하셨다.

"내가 다 생각해 둔 게 있다고. 제발 나서지 좀 마. 본인이 할 것도 아니잖아? 왜 나서? 그냥 가만히 있으라니까? 내가 알아서 한다고. 왜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하고 그래? 내가 말했잖아. 전복죽 좀 하고 도토리묵 쑤어 가려고 했다고. 그리고 전도 내가 다 생각해 둔 게 있다고. 모르면 가만히 있어. 나한테 미리 물어보기나 하든가. 왜 자꾸 나서냐고? 제발, 제에발! 나서지 마! 본인이 할 거 아니면 그냥 내가 하는 거 보고나 있으라고!"

물론 생신상에 전복죽이라니 좀 안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한데, 날도 덥고 입맛 잃고 기력이 쇠하셨을 시부모님을 위해 점찍어둔 메뉴였다. 이가 안 좋으신 아버님을 생각해서 전복도 미리 아주 얇고 작게 다 손질해 놨다. 거하게 생신상을 차릴 마음은 없다. 전에 도토리묵을 쑤어서 시부모님 밥상에 내어 드렸더니 계속 맛있다 맛있다 연신 말씀하시던 모습에 얼마나 보람차던지. 그 기억을 더듬어 진작에 나는 국내산 도토리가루 100% 짜리로, 도토리 가루 외엔 아무 첨가물도 넣지 않았다는 그 말을 철석같이 믿고 주문해서 보관 중인 상태다. 그리고 사실 도토리묵 쑤는 것처럼 쉬운 일도 없다.

"그리고 내가 전부터 계속 말했지? 어머님 생신 때 기본적으로 도토리묵하고 전복죽은 해 갈 거라고. 그때 내 컨디션 봐서 전이랑 나물도 좀 할 거라고. 어머님이랑 형님 드리려고 키위청하고 레몬라임청이랑 청귤청도 진작에 다 담가 놨다고. 내가 만든 고구마순 김치도 봐서 가져갈 건데 왜 느닷없이 나서고 그래?"

"그랬나?"

"그랬나가 아니라 그랬어. 100번은 말했겠다."

물론 거짓말을 아주 심하게 많이 보태자면 말이다.

저렇게 그 양반은 사람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듣는다.


물론 날도 덥고 음식 준비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일 년에 딱 한 번, 앞으로 내가 어머님 생신 때 음식을 하면 얼마나 더 하겠는가? 많아야 스무 번 정도 되려나? 서른 번도 아니고 스무 번 정도면 할만하다. 매년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주 그럴싸하게 하겠다는 것도 아니며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는 해 드리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나름 준비하고 있었던 건데 중간에 누가(그의 사회적 지위와 체면을 생각해서 그가 누구인지는 결코 밝힐 수 없다.) 괜히 나서 가지고 말이야. 요즘 부쩍 몸이 안 좋아서 전은 내 컨디션을 보고 할까 말까 하는 중인데, 그런데 대놓고 '전 몇 가지 해 가겠다'라고 확실히 못 박아 버리면 당연히 그렇게 해 올 줄 알고 있지 않겠는가. 그리고 당연히 그 부분은 둘이 상의 하에 정한 것(이것이 상식 아닌가?)이라고 생각할 것이고 말이다.

"당신이 토요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전 하면 되겠다. 그치?"

이 인간이 나서지 말라고 그렇게 신신당부했는데 또 나서네?

내가 알아서 한다니까?

일찍 일어나든 늦잠을 자든 내가 정말 전을 하겠다고 마음먹으면 어떻게든 알아서 할 거라니까?

어머님,

어쩌다가 저런 아들을 낳으셨나요?

본인 친엄마인데 왜 본인이 뭐라도 해 볼 생각은 안 하는 걸까?

누나도 하는데?

어머님을 봐서 참는다. 좋은 날 얼굴 붉혀서 좋을 것도 없고, 그 양반과는 별개로 난 어머님께는 나쁜 감정 같은 건 없으니까. 항상 내게 다정하게 대해 주시고 빈말이라도,

"네가 OO이랑 사느라 고생한다, 며늘아."

이렇게 말씀하시는 어머님을 생각하며 잠시 어머님의 아들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나저나, 내년 우리 엄마 생신 때 슬쩍 말해봐야겠다.

"장모님 생신인데 간단하게 전 몇 가지 좀 해 봐.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서 말이야. 간단하게 전 몇 가지만!가는 전 오는 전, 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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