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 그만뒀으면 '그런 거라도' 하라고?
있잖아요, 저는 사무관님의 부인이 아닌데요.
22. 12. 16. 오지랖꽃이 피었습니다, 활짝< 사진 임자 = 글임자 >
"공무원을 그만뒀으면 집에서 김밥이라도 싸야지!"
내가 왜 그런 말을 그분에게서까지 들어야 하는 것일까.
"일 그만뒀으면 이런 거라도 해야지. 아무것도 안 하네."
이미 넘치고 넘치게 남의 편에게 들었고, 듣고 있고, 앞으로도 들을 예정이라고 확신하는데.
남의 편이 저렇게 나오리라는 것은 충분히 예상했으므로, 각오했으므로, 그리 놀라울 일도 아니다.
그러나,
정말, 진심으로,
전생에 어떤 인연 (아니 악연인가?)이었기에 때때로 갠지스 강의 모래알만큼이나 헤아릴 수 없는 넓이의 오지랖을 내게 활짝 펼쳐주시는가.
어느 날 나는 중대한 결심을 했다.
'남의 편의 사무관님 주간 일기'를 쓰기로.
아니지.
주간 일기까지 쓸 가치는 못 느끼겠고 '간헐적 일기'라고 해 두자.
그분이 정년퇴직을 하시든 명예퇴직을 하시든 기념 혹은 선물로 '타서전'이란 명목 하에 세세한 사연 적어 한 권 선물해도 좋을 일이다.
하루는 아들이 체험학습을 가는 날이라 김밥을 말았다.
간혹 아침을 거르고 오는 직장인들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넉넉하게 10 줄을 말아서 두 줄은 남의 편에 보내 주었다. 배불리 먹는다기 보다 간단히 시장기라도 달래시라는 의미에서였다.
"다들 덕분에 맛있게 잘 먹었대."
이런 형식적인 인사치레를 받았을 때만 하더라도 집안 분위기는 평온했다.
언제나 남의 편이 퇴근하고 온 후 사달은 났다.
퇴근 후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빈 그릇을 안 챙기고 와서는 내 앞에서 실실 웃는 게 불길했다.
"또 무슨 쓸데없는 소리를 하려고 그래?"
"아니, 오늘 자기가 아침에 직원들이랑 같이 먹으라고 김밥 챙겨줬잖아."
"또 한 말씀하시던?"
"어떻게 알았어?"
요즘 (나에게만) 가장 요주의 인물이다.
남의 편의 사무관 님씩이나 되는 그분이.
"다른 직원들은 아침부터 고생했겠다고 다들 그러는데 사무관님이 뭐라고 하신 줄 알아?"
"내가 알아야 할 필요는 없잖아? 뻔하지 뭐. 들어도 그만 안 들어도 그만."
하지만 저 말은 틀린 말이다.
들으면 기분 상하는 말이고 안 들어야 (그나마 겉으로라도) 평화로운 집안 분위기가 유지된다.
"같이 일하는 여직원들은 새벽부터 김밥 싸느라 고생했겠다 말이라도 그러는데. 그 직원들은 다들 직장 생활하니까 직접 싸는 건 힘들고 사서 주는 거라고 생각하는데 사무관님은 안 그러시더라."
"내가 사무관님 의견까지 들어야 할 필요는 없잖아, 됐어, 거기까지만 해."
그러나, 자고로 내 말은 죽어라 안 듣기 때문에 남의 편인 것이다.
"그럼 당연히 집에서 만들어야지. 일도 그만뒀는데 김밥이라도 싸야지 이러시는 거 있지."
평소 그분의 언행으로 미루어 짐작건대 하루에 김밥 열 줄로는 성에도 안 차실 거다,라고 나만 생각했다.
100줄, 1,000줄 정도는 말아서 학교 앞에서 팔기라도 해야 만족스러워하실 것이다,라고 또 나만 생각했다.
뭐지?
나보고 김밥지옥 분식집이라도 창업하라는 건가?
충분히 예상했던 일이지만 얄밉게 고스란히 내 귓가에 들려주는 그 간접화법이 상당히 거슬린다.
나도 감정이란 게 있는 사람인데 썩 유쾌하진 않다.
"무슨 소리야? 난 일할 때도 한 번도 김밥 사 가지고 도시락 보낸 적이 없는데. 항상 내가 다 만들어서 보내줬는데. 그리고 뭐 아침마다 어린이집 갈 때 밥은 대충 먹였었나? 둘이 다른 어린이집 다닐 때도 꼬박꼬박 애들 밥도 다 챙겨 줬어. 나 혼자 다 따로 데려다주고 데려 오고."
"그러게 말이야. 그때 자기가 다 했었지."
"사무관님은 안 드셨겠지? 직장생활도 안 하는 남의 부인이 싼 김밥 따위 드실 리가 없지. 다음부턴 그 몫은 빼야겠네."
내가 그런 소리나 듣자고 착실히 김밥 챙겨서 보내 준 줄 아시나.
그리고 직장생활 안 하는 엄마라고 해서 다들 집에서 김밥을 만들어 보내지는 않는다는 것을 3년 전에 처음 알게 되었다. 아들 유치원 체험학습 날에 많은 엄마들이 김밥을 사서 보내서 친구들 김밥이 똑같았다고(같은 데서 주문했다고 했다. 그때 김밥을 주문할 사람 신청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나는 하던 대로 직접 내가 쌌을 뿐이다.) 친구들 김밥은 같은 모양, 같은 재료인데 자기만 김밥이 다르게 생겼다는 아들의 제보를 듣고서야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어디까지나 엄마가 선택할 권리가 있는 것이지, 더 엄밀히 말하자면 그 엄마 마음인 것이지 직장생활을 하고 안 하고와 자녀 도시락이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이더냐.
"나한테 자주 그런 말씀하시거든. 더 강력하게 말렸어야 했다고."
남편도 처음에 의원면직을 만만치 않게 반대했었는데 더한 복병이 나타나셨다.
포기를 모르시는 분이다.
아니 갈수록 더 집요 해지는 것 같다.
요즘 공무원들 의원면직이 그렇게 많다는데 '의원면직 방지 위원회'라도 결성되면 위원장 자리는 떼어놓은 당상이라고 감히 장담하겠다.
아니, 그분이 위원장이 되게끔 어떻게 해서든지 내가 발 벗고 나서리라.
직장도 안 다니는데 그런 거라도 해야지.
내가 그분에게 은혜 갚을 길이라곤 그것뿐이다.
"자꾸 한 소리 또 하고 또 하고 나도 좀 그렇더라."
나도 기분이 별로인데 옆에서 듣는 남의 편은 오죽하랴.
"왜 그때 더 세게 안 나갔냐고 그러면서 나중엔 그런 말 한 게 좀 그랬는지 '애들 다 크고 나면 그때 또 일하면 되지' 이러시더라."
정작 한 집에 동거 중인 사람도 간헐적으로 무슨 말을 하는데(매일은 아니지만, 가끔 말하는데, 어쩔 때는 종종이기도 하고) 누구보고 일해라 마라야?
그분의 오지랖의 넓이는 과연 얼마란 말인가.
톨스토이는 '사람에게는 얼마나 많은 땅이 필요한가'를 집필했고, 나는 바야흐로 '사무관님에게는 얼마나 넓은 오지랖이 필요한가'를 집필이라도 해야 하는 걸까?
사람이 하고 싶어서 하는 말을 내가 어찌할 수는 없다.
거기까지는 좋다. 사람에게는 말할 자유가 있으니까.
하지만 아무 상관도 없는 남의 얘기이고, 게다가 그런 말을 듣고 오면 잠잠하던 남의 편이 또 의원면직한 것에 대해 지난 일을 들추면서 듣기에 아름답지 못한(전혀 아름답지 못한) 말을 내게 한다. 그러다가 서로 감정이 격해지면 부부싸움 나는 건 시간문제다. 거의 그 끝은 부부싸움으로 끝난다. 이게 부부 싸움할 거리나 되냔 말이다.
끝난 지 일 년이 다 되어가는 지난 일을, 돌이킬 수도 없는 그 일을 왜 아무 상관도 없는 남이 그렇게 간섭하실까. 그거 아니어도 부부 싸움거리는 차고 넘치는 마당에 안 보태줘도 되는데 이젠 외벌이라고 아무리 보탤 게 없어도 그렇지 오지랖을 보태셔? 왜 굳이 분란을 만드느냔 말이다. 남의 가정사 어떤지 자세히 알지도 못하면서 그렇게 '함부로'(정말이지 함부로라고 밖에는) 이러쿵저러쿵하는 거, 그건 아닌 것 같다, 고 나는 생각하는데 남들은 아닌가 보았다.
나는 그분의 아내가 아니다.
그분은 내 남편이 아니다.
게다가 내 시아버지도 아니다.
아무 상관없는 남이다
벌써 몇 번째 출연이시더라?
네 번째인가 다섯 번째인가.
이 정도면 출연료라도 챙겨드려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직장도 안 다니는 내가 무슨 수로 출연료를 챙겨드린단 말인가.
아니, 그분의 수당을 마련하기 위해서라도 일을 해야 하나.
당신의 부인이 출산 후 육아 휴직하겠다는 것도 끝끝내 반대해서 못하게 하셨다면서, 절대 안 된다고, 그 부인을 제지했으면 됐지 왜 남의 부인까지 걸고넘어지실까. 부인을 제지해서 성공하셨으면 됐지 아직도 목마름을 느끼시는 걸까.
욕지기가 일 지경이다.
반드시 꼭 그 누군가의 앞에서 나는 그 짓을 하고만 싶다.
걸핏하면 무례함의 극치를 달리며 오지랖 자락을 펄럭이는 그 누군가의 앞에서 나의 역겨움을 다 게워내고만 싶다.
가끔 그런 생각도 든다.
제발, 남편들은 자기 집안이나 잘 건사하고 자기 아내 일에나 잘 집중하고 살았으면 좋겠다. 내 가족 하나 건사하기도 얼마나 힘든데.
환경은 엄청나다.
사람의 환경이란 것이, 가정환경이든, 직장 환경이든, 주위를 둘러싼 그런 환경이 얼마나 중요한지, 한 개인에게 얼마나 크나큰 영향을 미치는 것인지를 말이다.
언젠가 사무관님이 회식이 있는데 우리 집 근처라고 해서 남의 편은 또 그 자리까지 성실하게 모셔다 드렸다고 했다.
"멀리서 일자리 찾을 거 뭐 있어? 그렇게도 내 취업 걱정을 해주시는데 사무관님한테 나 일자리 하나 만들어 달라고 하면 되겠네. 어디 좋은데 있나 소개라도 좀 해달라고 해봐."
"무슨 말이야?"
"회식도 자주 하시는 것 같던데, 내가 사무관님 운전기사라도 해야겠다. 그럼 누가 회식 때마다 모시러 가고 모시고 오고 다음날 또 출근길에 모시러 가고 그런 거 안 해도 되잖아. 나 직장 생활 안 하는 거 그렇게 못마땅해하시는데 그 정도는 해 주시겠지. 다행히 내가 면허는 있잖아. 내일 당장 가서 말해. 안전히 모셔다 드릴 자신 있다고. 나 그 자리에 취직시켜 달라고. 알았지? 임금만 안 떼어먹고 주면 돼. 4대 보험까지는 바라지도 않아. 알았지? 꼭 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