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대한민국 국민의 오지랖권에 대하여

권리 혹은. . .

by 글임자
23. 1. 28. 외벌이의 고단한 밤

< 사진 임자 = 글임자 >


"사람들이 또 물어보더라."

"그 얘기 왜 안 하나 했네."

"부인은 뭐 하냐고."

"아버지 뭐 하시냐고만 물어봐야지."

"부인이 무슨 일 하냐고."

"부인하고 연락 두절됐다고 그러지."

"그냥 집에 있다고 했지."

"차라리 그냥 집 나갔다고 하지 그랬어?"

"외벌이라니까 다들 놀라."

"앞으론 부인 없다고 그래 그냥."

"다들 살기 팍팍하지 않냐고 하더라고. '부인 보고 일하라고 해.'이러고."

"왜 자기 부인도 아닌데 남의 부인이 일 안 하는 꼴을 못 보는 거야? 자기 부인들이 일하면 된 거지. 내가 그 사람들 부인만 아니면 되는 거 아니야?"

그렇잖아도 어째 잠잠하다 했다 내가.


"이제 한 달 되어가는데 적응 좀 됐어?"

"사람들이 나 다 적응한 걸로 생각하더라."

"슬슬 적응될 때도 됐지."

"근데 사람들이 뭐라는 줄 알아?"

몰라도 알겠다.

또 그 얘기일 것이다.

남의 가정사 들추기, 남의 부인 신상 파헤치기, 남의 일에 오지랖 펼치기, 뻔하다.

역시나 뻔했다.

물론 나는 예상하고 있었다.

그래도 예상보다는 그 시기가 많이 늦긴 하다.


"다들 혼자 벌어서 어떻게 사냐고 그래."

"왜 그렇게 남의 일에 간섭이실까? 보태달라고 할까 봐 그럴까?"

"당연히 부부 공무원인 줄 알고 물어보더라니까. '부인은 우리 직렬? 어디?' 이러면서 말이야."

"부부 공무원 아니면 거긴 발도 못 붙이겠네."

"다들 부부 공무원일 거라고 생각하니까."

"세상에 부부 공무원만 있는 건 아니잖아."

"그래도 여긴 특히 거의 다 그래. 그래서 외벌이라고 하면 다들 놀라."

"그게 놀랄 일인가?"

"그러지. 요즘 외벌이는 흔하지 않으니까. 옛날 사람들은 외벌이도 흔했지만."

"아무튼 그 사람들이 간섭할 일도 아니고 걱정할 일도 아니잖아."

"나보고 부인 보고 일하라고 하래."

"자기들 부인이나 신경 쓰지 왜 남의 부인한테 일해라 마라야?"

"사람들이 어떻게 살려고 그러냐고 하면서 자꾸 그러더라니까."


아,

나는 어떤 욕구가 일었다.

그 옛날 매슬로우도 간과하였던, 자아실현 욕구의 그 상위 단계.

그러니까 말하자면...출판의욕구.

'의원면직한 부인을 둔 남편이 직장에서 일도 안 하는 부인에 대해 간섭할 때 응대하는 법'

혹은

'집에 있는 아내를 둔 남편에게 직장에서 간섭할 때 대처하는 사례별 모음집'

이런 종류의 소책자라도 급히 엮어봐야 하는 게 아닌가 하고 말이다.

마침 남편이 책을 내주겠다고도 했다.

하지만 그가 말한 그 책이란 것은 최소한 저런 종류의 것은 아니리라.

가뜩이나 나무도 없는데 굳이 나까지 출판업계에 뛰어들어 소중한 나무들이 베어지는 아픔을 차마 느끼고 싶지 않아 꾹~ 참기로 했다.

의욕은 있으나 자본이 없어서가 결코 아니다.

(물론 이렇게 거듭 부인하는 것이 더욱 수상쩍게 보이기는 하다.)


"그래도 어떤 사람은 맞벌이라고 꼭 두 배로 버는 것도 아니라고 그러더라. 아껴 쓰고 살면 된다고."

나는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그분(그분이라고 칭해야 마땅하다. 그렇게 불리어야 마땅한 분이다.)을 세상 양반 중의 양반이라고 단정했다.

물론 진심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남편 얼굴을 봐서 그 입장을 생각해 주느라 그렇게 말해준 것일 수도 있으니까) '부인 보고 나가서 일하라고 해라'라고 부추기는 다수 속에서 홀로 진주처럼 빛나는 그분에게 '말이라도 고맙다.'라고 개인적으로 연락이라도 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에 이르렀다.

모든 일에는 그만한 나름의 사정이 있었음을 모르는 것일까?

하긴, 남이 남의 사정 따위가 무슨 상관이랴, 그저 찧고 까불기 좋은 가십거리밖에 되지 않을 것인데.


"아마 정년퇴직할 때까지 계속되겠지?"

"뭐가?"

"나 일 안 하는 거 가지고 사람들이 간섭하는 거 말이야."

"하도 귀찮게 묻길래 나중엔 그냥 그동안 일하다가 작년에 그만뒀다고 했어."

"정말 사람들은 왜 그렇게 남의 일에 간섭일까?"

어떤 사무관님이 또 생각나는 밤이었다.

그분의 업무가 이쪽으로 다 이관되었나 보다.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이고, 그 사무관님을 떠나왔어도 새로운 곳에서 오지랖은 또 시작되는구나.

내일 당장 지구가 멸망한다 하더라도 '오늘 하루 남의 가정사에 오지랖을 기꺼이 펼칠 사람', 인류가 멸종되어도 쉽게 사라지지 않을 영혼불멸의 오지라퍼...


물론 나도 안다.

'모든 대한민국 국민에게는 남의 가정사에 적극 간섭할 수 있는 '오지랖권'이란 게 있고 국가가 이를 적극적으로 보장해 준다.'라는 사실을.

나는 듣고 흘려버리고 남의 일에 웬 간섭이냐 이러면서 무시할 수 있지만 남편은 다르다.

그는 매일 출근해서 종종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과 만나고 함께 일을 한다.

나는 지금 괜찮다고, 이대로도 좋다고 하지만 남편은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지금 그런 집에다 사방팔방에서 기름을 저 지하 깊은 곳으로부터 끌어올려 골고루 들이부어 주시는가.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남편이 받는 스트레스(분명 스트레스를 받을 것이다. 잊고 있다가도 생각날 것이다.)를 그 사람들이 알 리가 없지.

이렇게나 사람들이 무책임하다.

그 팀 안에서 별 생각도 없이 한 사람씩만 말을 내뱉어도 듣는 남편 입장에서는 금방 서 너 마디 스트레스가 되어 그의 어깨에 올려질 터인데 말이다.


"그러나 남편이여,

그 흔하지 않다는 외벌이 공무원이라는 희귀템을 장착하신 것에 대해 자부심을 갖길 바란다. 아무나 소화 못하는 그 귀한 것을 소유한 것만으로도 당신은 이미 핵인싸, 시대의 (외벌이)아이콘!"

이라고는 깐죽대지 못했다, 물론.


그리하여 잠잠하던 그 어떤 일에 나는 또 증거자료 하나를 가뿐히 수집하게 되었다.

대국민 공개 영구 보존 문서로서의 가치는 이미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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