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마어마한 육아휴직 기간의 미납 기여금은 덤입니다.
일을 그만두겠다는 내 결정을 도저히 못 받아들이겠다는 태도로 일관했던 남편은
"그럼 우리 관계를 정리하자."
라고 내가 한마디 하자 더 이상은 고집부리지 않았다.
나는 남편이 고집을 부렸다고 생각하고 남편은 내가 그러했다고 생각하겠지.
남편이 아이들을 소집했다.
"얘들아, 이제 엄마 회사 안 나갈 거야. 엄마가 몸이 안 좋아서 공무원 퇴직하기로 했어."
"진짜? 그럼 맨날 집에 있을 거야?"
"응, 그러니까 앞으로 너희가 엄마 말도 더 잘 듣고 엄마가 무슨 일 부탁하면 잘 들어주고 해야 돼. 잘할 수 있겠지?"
"응, 걱정 마. 우리가 엄마 많이 도와줄게."
훈훈하고 훈훈하다.
근래에 보기 드물게 오랜만에 보는 풍경이로세.
"그럼 엄마, 우리랑 맨날 놀아주고 맛있는 것도 많이 만들어 주고 그럴 수 있겠네?"
이 녀석들아.
누구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엄마가 지금껏 육아휴직 하루도 않고 일만 하고 산 사람인 줄 알겠다.
작년까지 3년간 육아휴직하면서 맨날 같이 놀아 주고 만들어서 먹여주고 했잖아.
물론 맨날이라고는 말 못 하지만 나름 노력했다.
할 수 있는 만큼이었다.
"어쨌든 엄마 이제 회사 안 가니까 학교 갔다 오면 엄마랑 더 오래 같이 있을 수 있어."
"어? 그럼, 아빠도 회사 안 가고, 엄마도 회사 안 가네. 와, 신난다."
아이들에겐 축제의 장이 펼쳐졌다.
철없으니까.
이제 겨우 9살, 11살이다.
"그래. 이제 우리 가족 넷이 여행도 많이 다니고 하자. 아빠 육아 휴직 끝날 때까지."
저런 걸 '지키지도 못할 약속'이라고 할 거다 아마도.
남편은 일단 공무원 연금부터 알아보라고 했다.
내가 그동안 얼마나 납부를 했는지, 과연 받을 수나 있을는지.
언제쯤에나 그 대단한 공무원 연금이란 걸 구경할 수 있을는지.
남들이 다 저거 하나 바라고 공무원 한다는데 과연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이제 확인해 볼 차례다.
근속연수가 13년 나왔다.
10년이 넘었으므로 일단 연금을 받을 대상자는 된 셈이다.
확인해 보니 2041년 12월에 개시다.
까마득하다.
그전에 설마 지구가 멸망하지는 않겠지?
학창 시절에 시험 전날, '지구가 멸망했으면', '어디 전쟁이라도 안 나나' 하는 그런 무시무시하고 철없는 생각 많이 했었는데, 지금에 와서는 첫 연금이라도 손에 쥐어보게 이 지구도, 인류도 모두 무사했으면 좋겠다.
그런데 지구는 무사할 것 같은데, 공무원 연금이 무사할 것 같지 않은 어쩐지 불안한 이 느낌.
기여금을 내기는 냈지만 정말 내가 그걸 받을 수는 있을지, 내면서도 항상 그게 의문이었다.
국민연금이고 공무원 연금이고 이거나 저거나 항상 돈이 없다 바닥났다, 앞으로 어렵다 이런 소리들만 해대는데 불안하지 않을 수 없다.
사직서는 서식도 찾지 못했는데, 아직 사무실에는 입도 뻥끗 안 했지만 일단 재빨리 공무원연금공단에 들어가서 무엇을 어떻게 신청해야 하는지 살펴본다.
공무원 연금 지급 방식부터 선택하자.
한꺼번에 일시금으로 받을지, 과연 그날이 오기는 할까 싶은 2041년, 차마 상상도 안 되는 그 나이에 매월 연금으로 받을지 둘 중 하나다.
세상 쉽다.
보기가 5개나 있는 시험도 많이 치렀는데 둘 중 하나만 고르면 된다니 쉽지만 희한하게 고민은 더 된다.
난 1980년생, 퇴직과 동시에 일시금으로 받게 된다면 없는 살림에 당장 큰 수입이 들어오겠지만, 그렇게 해서 까딱 잘못하면 남편이 한탕해 버릴지도 모르므로 얼른 매월 연금으로 받는 쪽에 클릭한다.
평소 끈질기게,
"어디 좀 끌어올 데 없을까? 지금이 적기인데 말이야."
이러면서 어디 거금을 감춰두고 안 내놓는 아내 다그치듯 한다.
11년 전 공시생 시절부터 이렇게 일관성이란 걸 보여주신다.
남편, 저 연금 남의 것이야. 남의 것은 보기만 하는 거야. 함부로 손대는 거 아니야.
항상 기억해야 해.
이렇게 저렇게 급여 산정 안내가 되어 있고 어쩌고 저쩌고 복잡하게 돼 있지만, 정작 내게 중요한 것은
'내가 얼마나 냈고, 몇 년도에 개시되는지, 그 금액이 얼마인지' 그뿐이다.
저 정도만 알면 되는 거다.
오죽 알아서 다 산정해 가지고 안내해 주겠어?
요즘은 좋은 세상이니까 프로그램 돌려서 자동으로 다 계산돼서 어련히 잘 작성했을까.
어라? 그런데 예상 연금 수령액이 참으로 겸손하다.
이런 게 바로 소확행이다.
워낙 소액이라서 내 연금이 맞는지 반드시 확인에 필요한 행동을 해야 한다.
그런 연금액이 세상에 있는지,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싶어 하지 않음이 분명하다.
기초연금보다는 조금 더 많다.
그냥 없는 셈 치자고 생각한다.
그것도 어디야, 안 받는 것보단 낫지.
그래도 그렇지 13년을 냈는데 고작 매월 57만 원이라니.
아니다, 내려다보고 살자.
그 돈도 어디서 누가 그냥 안 준다.
장수해야 할 이유가 생겼다.
기여금은 2009년 9급 신규자 때 17만 원인가 18만 원이 안 되게 매달 납부했던 것 같고, 최근엔 거의 30만 원이 다 되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어쨌거나 그 언저리다.
무병장수하는 길만이 기여금을 납부했던 나에게 은혜 갚는 길이다.
은혜는 갚으라고 있는 거다.
퇴직일시금으로 받게 된다면 7000만 원 정도 됐던 것 같다.
9급 4년 조금 넘게, 8급을 4년 정도, 그리고 나머지 기간은 7급으로 근무했다.
2018년 7월 1일 자로 7급 승진을 하고 2019년 1월 1일 자로 육아휴직 들어가서 2022년 1월 3일 자로 복직을 했다.
건강이 더 나빠지지만 않는다면 인형 눈이라도 매일 천 개씩 붙이든지, 구슬을 꿰든지 일거리만 있으면 찾아 하면서 연금 받고 살면 그럭저럭 살아지지 않을까나.
금전적인 부분에 연연했다면 아예 의원면직 말도 안 꺼냈을 것이므로 그 겸손한 연금액에 굳이 서운해하지 않겠다.(고 다짐해 보지만 솔직히 마음 한편은 왠지 씁쓸하다.)
일단 연금은 일단락됐고, 생각도 안 하고 있었는데 '퇴직수당'이란 게 있네?
퇴직하면 한 번 주고 끝내는 돈이다.
어라? '0'이 몇 개가 붙은 거야?
세고 또 세어 봤는데 잘못 본 줄 알았다.
자그마치 1300만 원이 넘는다.
천만 원짜리 만기 된 적금을 찾는 기분이다.
앞서 겸손한 연금 수령액에 내 기대치는 한참 떨어져 있었기에 저 퇴직수당 금액을 보고 순식간에 천만장자가 된 기분이다.
퇴직하면 당연히 받는 돈이겠지만, 왠지 공짜로 얻은 기분이랄까.
단순한 나는 퇴직 수당 금액에 기분이 좋아졌지만, 이내 그동안 밀린 3년간의 기여금이 생각난다.
그것도 내긴 해야 할 텐데.
꼭 내야 되는 건가? 의무는 아니겠지?
3년 간의 육아휴직 기간 동안 2년 6개월은 휴직 수당도 안 받았는데.
공무원연금공단에 전화를 걸어 본다.
"제가 곧 퇴직할 예정인데요. 육아휴직 기간 동안 안 냈던 기여금은 그냥 안내도 되는 건가요?"
전화 상담원은 언제나 친절하다.
마치 거울을 들여다보는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최근 3년간 육아휴직하셨지요?"
"네, 맞아요."
"그리고 그 기간 동안은 기여금을 납부 안 하신 거고요? 맞으세요?"
"네."
나의 원래 계획은 복직하고 나서 매달 두 배로 내고, 복직 후 6개월이면 육아휴직 수당 못 받은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 주니까 그걸로도 보충하면서 해결하려고 했었다. 그리고 정근수당, 명절 휴가비 등등으로 정리해 나가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그 방법은 요단강을 건너갔고, 정작 미납금이 얼마나 되는지부터 확인해야 했다.
"그 미납 금액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있을까요?"
"3년간 미납 기여금이 1,200만 원 조금 넘습니다."
"네에? 1,200만 원이오?"
무슨 전셋집 구할 때 들어가는 계약금 같다.
상상도 못 했던 금액이다.
세상에 만상에!
무슨 기여금이 저렇게 많담?
직장에서 반을 내고, 내가 반만 내는 건데도 그렇게나 많다니.
퇴직수당을 덤으로 받았다며 한껏 들떴던 마음이 일순간 물에 퐁당 빠진 솜뭉치처럼 축 쳐졌다.
"그거 꼭 내야 하는 건가요?"
순진한 9급 신규자 또 나왔다.
"네, 육아휴직 기간도 재직기간에 산정되니까 그 금액은 무조건 납부하셔야 합니다."
"그거 안내면 안 되는 건가요?"
어떻게든 안 낼 수도 있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 혹시?
우리나라는 안 되는 게 없는 나라잖아.
찾아보면 있을 거야.
친절한 상담원은 이내 말을 덧붙였다.
"내셔야 됩니다. 금액이랑 계좌번호 알려드릴 테니까 그쪽으로 입금하시면 바로 처리해 드리겠습니다."
"아, 그래요? 일단 보내주세요."
우리나라에서 안 되는 것도 있긴 있구나.
전화를 끊고 10,800 번뇌에 빠졌다.
당장 1,200만 원이나 되는 큰돈을 어떻게 구한담?
무조건 내야 한다는데.
대출을 받아야 하나?
모양이 좀 그렇다.
퇴직하려고 대출을 받는다?
다시 전화를 걸었다.
"좀 전에 문의드렸었는데, 그거 언제까지 납부해야 하는 건가요?"
"퇴직 신청하시고 퇴직일 전에 직장 연금 담당자에게 문의해서 처리해 달라고 하셔도 됩니다."
"아무튼 미리 다 내고 퇴직해야 한다는 거죠?"
"네, 퇴직 수당이 1,300만 원이 조금 넘으니까 거기서 공제하고 나머지 수당 받으셔도 됩니다."
유레카!
다 숨 쉴 구멍은 있구나.
내가 왜 그 생각은 못 했지?
그나마 다행이다.
대출을 받아 기여금 미납금을 내는 초유의 사태까지는 초래하지 않았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