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연하게, 정정당당하게
< 사진 임자 = 글임자 >
<사건 발생 보고>
누가 : 공시생 남편을 둔 아내(=나)
일시 : 2011년 10월 말에서 11월 초
장소 : 아내가 근무한 민원실
무엇을 : 2011년도 교행 필기 합격자 명단 공문
어떻게 : 합격자 주소지 확인 요청
왜 : 절차상의 필요에 의해서?
그 세월을 어찌 살았나 싶다.
남편이 2011년 1월에 우체국 보험을 파는 건 도저히 적성에 안 맞다며 의원면직을 하고, 그 해 10월 경에 교육행정 시험 보겠다고 선포한 지 9개월 만이다.
나는 당시 근처에 도교육청이 있는 지역 민원실에서 근무 중이었다.
주변에 공공기관이 사이좋게 너도나도 다 들어서서 별의별 공문들이 다 들어오는 곳이다.
경찰청에서 변사체가 발견되었다며 신원조회가 들어오질 않나, 연고자 없는 행려병자 찾아도 찾아도 가족이 없으니 창성을 하고 신분증을 만들어 시설에 입소하기 위해 관련 시설에서 한 달에도 몇 차례씩 찾아오고, 금융기관에서는 이해관계인을 찾아 수 십 건씩 초본을 요청해 대고, 법원은 법원대로, 학교는 학교대로 요구 사항이 많기도 하다.
아무튼 공공기관 부자동네다.
떠오르는 공공기관계의 강남이 따로 없다.
운명의 그날,
임신 초기라 미친듯한 입덧으로 내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 그 시절에도 전과 똑같이 일은 해 나가야 했다.
일은 절대 줄어드는 법이 없다.
더 늘어났으면 늘어났지.
웬 아저씨가, 딱 봐도 목에 뭘 걸어 둔 것을 보아하니 공무원인가 보다.
다짜고짜 내 앞으로 오더니,
"이거 이번에 교행 필기 합격자 명단인데 주소지 확인 좀 부탁합니다."
이러면서 내게 공문을 들이미는 거 아닌가.
아니 이게 웬 횡재냐?
이런 우연이 다 있을까.
남편이 시험을 본 지역의 교행 합격자 명단을 아내가 입수하게 되다니.
물론 그 교육청 담당자는 수험생의 아내가 시치미 딱 떼고 민원실에서 기다리고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겠지.
물론 공공기관에서 전자문서로 보내와 각종 요청사항을 공문으로 주지만 어쩔 때는 급하다며 결재 중이라고 하면서 직접 공문을 들고 와서 부탁하는 경우도 많다. 어차피 조금만 지나면 공문이 우리 쪽에서 접수하겠지만 확실히 결재 중인지 확인을 하고 서무에게 그런 공문이 온 게 맞는지도 확인을 하고 급한 대로 먼저 일을 진행하기도 했다.
급한 업무는 왜들 그리도 많은지 한 두 군데도 아니고.
우리라고 절대 한가하지 않다.
민원실 한가한 데 아니다.
하는 일도 많고 업무도 다양하다.
서로 급하다고 아우성쳐도 소용없다.
어차피 다들 급한 거, 선착순이다 깔끔하게.
요즘은 하도 사기꾼들이 많으니 조심해야 했다.
방문자가 진짜 공무원인지 아닌지도 의심스러울 때가 있었으니 경계를 늦추어서는 안 된다.
일단은 그 공문이 이쪽으로 전자상 도착해야 나도 안심이 됐다.
공무원의 순간의 실수가 큰 일을 저지르는 수도 있다.
항상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아직 정식 발표는 안 난 상황이고 합격자들 주소 확인차 들른 거로구만.
지금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내가 공무원 시험을 봤던 13년 전엔 등록기준지와 주민등록상 주소지 두 군데 모두 응시할 수 있었는데, 일단 필기 합격을 하면 정말 이렇게 주소 이력도 확인하는가 보았다.
정말 확인하긴 하는구나.
'교행 필기 합격자 명단'이란 말에 입덧도 멈춘 느낌이었다.
남편은 당시 그 지역 교행시험을 치른 사람이다.
최대한 친절하게(나는 언제나 친절했다고 생각한다.)
"네, 그럼 다 확인하고 마무리되면 연락드릴게요."
바쁘실 텐데 어서 가서 볼 일 보셔요. 남편 이름 있는지 얼른 확인해보고 싶어요.
얼른얼른 사무실 가셔서 연락드릴 때까지 기다리셔요, 나머진 제가 다 알아서 할게요.
그 공문을 받아 들며 나도 약간은 떨었던 것 같다.
같이 일하는 언니들도 그때까지 남편이 우체국을 그만둔 것도, 교행시험을 치른 것도 모르고 있었다.(고 나는 믿었다.)
그 교육청 담당자를 얼른 돌려보내고 서류 봉투를 열었다.
공평의 주님, 자비로우신 부처님.
제가 그동안 헛살진 않았군요.
하마터면 나는 사무실 안에서 소리를 지를 뻔했다.
억지로 이렇게 인사발령 내기도 힘들 거야.
이 합격자 명단이 진정 남편이 치른 필기시험 합격자 명단이란 말이더냐.
남편은 시험을 보고, 아내는 그 필기시험 합격자 명단을 입수하고, 여전히 뭔가 공평한 부부다.
물론 그 교육청 담당자는 시험 응시자의 아내가 그곳 민원실에 앉아 있으리라고는 꿈에라도 몰랐을 거다.
하지만 알았다고 해도 나한테 그 명단을 건네주지 않고는 못 배겼으리라.
내가 주민등록 담당자인데 누구한테 가리오.
내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일이지, 아무렴.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그 남편의 이름이 있다.
매일 보는 얼굴은 그리 안 반가워도, 선명히도 인쇄된 그 까만 이름 석자는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그런데 잠깐, 솔직히 남편의 이름은 흔하디 흔하다.
설마 동명이인은 아닐 테지?
어디 보자, 생년월일이.
맞네 맞아.
그 사람이야.
그는 내가 알기로는 쌍둥이가 아니었으므로 이 사람이 지금 집에서 뒹굴뒹굴하고 있을 그 사람이 거의 확실하다.
그것도 위에서 서너 번째에.
성적순인가?
그냥 내 추측이다.
아빠를 이렇게 상위권에 올려놓으려고 그렇게 엄마가 입덧을 하게 만들었구나.
합격아, 드디어 네가 크게 한 건 했구나.
우리 합격이가 아빠를 합격시켜 준 거야.
내 딸도 그 감격스러운 현장에 함께 하고 있다는 생각에 정말 가슴이 벅찼다.
하도 주변 공공기관에서 요청하는 공문이 쏟아지니까 솔직히 평소에는 그리 반갑지 않다.
하지만 이런 공문이라면 하루에 100건씩 들어와도 좋을 것 같다.
남편이 하는 걸 보고 있자니 가망이 없어 보여서 크게 기대는 안 했는데 그날 잘 찍었나 보다.
그동안의 행적이야 어쨌든 그래도 필기는 합격했으니까 일단은 지난 과거는 덮기로 한다.
나는 과거에 연연하지 않는 사람이니까.
아직 면접이 남았지만 거기까지 생각하고 싶지 않다.
필기 합격만도 어디냐.
나에게만은 기쁜 이 일을 누구에게라도 말하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하다.
그런데 말할 수가 없다.
이것도 비밀이라면 비밀이니까.
체통을 지키고 잠자코 있자.
공무원의 의무 중 '비밀유지의 의무'뭐 이런 거 있었던 것 같다.
공무원은 업무상 알게 된 비밀을 누설해서는 안된다 어쩐다 그랬었지 아마?
괜히 어설프게 입방정 떨지 말고 조신하게 태교나 하고 있자.
어차피 내일모레면 필기 합격자 공고문이 뜰 텐데.
지금 살고 있는 현재 남편 하고도 쭉 살아온 사람이다.
합격자 발표날까지 그 며칠을 못 참을 거야 없다.
"동네 사람들, 남편이 교행 붙었어요~"
아무도 관심 없는 남의 남편이지만 대숲으로라도 들어가 소리 지르고 싶었다.
그 누구보다도 이제 한 고비 넘긴 남편에게 당장 전화라도 걸고 싶다.
하지만 참아야지, 쉽게 합격의 기쁨을 느끼게 하면 안 돼.
그 기고만장한 꼴을 어찌 볼꼬?
그런 건 최대한 늦게 보는 게 태교에도 좋다는 판단 하에 합격소식 전달은 일단 보류하기로 한다.
나 혼자만의 비밀로 간직하기로 한다.
합격자 발표하기로 한 그날 아침에 내가 한 발 앞서 터트려야지(물론 남편에게만).
말할 수 없는 비밀을 간직한 나는 입은 근질근질하고 세상이 갑자기 아름답게 보이기도 했다.
그런 날엔 그 어떤 민원인이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고 막말을 한다 해도 관대하게 웃어넘길 의향이 있었다.
지금쯤 남편은 초조하게 합격자 발표하기만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겠지?
며칠 더 애타야지, 이렇게 쉽게 합격 소식을 전할 수는 없어.
설사 그 소식을 기다리다 눈이 빠져버린다 해도, 눈 빠져서 죽은 사람이 있다는 얘긴 아직 못 들어봤으니까.
입덧을 하다가도 실실 웃는 나를 보며 언니들이 의아해했다.
'저건 지나친 입덧의 부작용인가?'
하는 얼굴로 쳐다본다.
순간순간 다 말해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으나 나는 참을성이란 게 있는 사람이다.
태명을 잘 지었어, 역시.
합격이가 반 이상은 한 거다.
역시 이름이 좋은 영향을 미쳤구나.
모든 게 내 계획대로 착착 잘 진행되고 있어.
암, 그래야지.
남편이 시험 보러 간 날 나는 혹시라도 낮잠을 자다가 남편이 떨어지는 꿈이라도 꿀까 봐 낮잠 한숨도 못 잤다.
다른 사람들은 임신을 하면 시도 때도 없이 졸린다던데 난 그런 것도 없어서 낮잠도 자 본 기억이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 남편이 교행 시험을 치르는 그날 너무 졸음이 쏟아져서 얼마나 괴로웠는지 모른다.
나 낮잠 자는 거랑 남편이 시험 보는 거랑 무슨 상관이라고 행여나 불길한 꿈이라도 꿀까 봐......
드디어 나만 아는 비밀을 며칠간 간직한 채 교행 필기 합격자 발표날이 다가왔다.
그날 아침에 나는 아침 일찍 출근을 해서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댁이 합격했어요."
그리고 나 자신에게 말했다.
"그동안 고생 많았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