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을 피하는 방법

혹은 남편을 홀로 쉬게 하는 방법

by 글임자
23. 2. 22. 어떤 커플(로 추정되는)

< 사진 임자 = 글임자 >


"내일 하루만 더 나가면 이틀 쉰다."

"설마 목요일에 쉴 거야?"

"응, 내일 가서 말해야지."

"바쁘다고 거절당하는 거 아냐?"


월요일 저녁 한껏 들떠 퇴근한 직장인이 있었다.

곧 삼일절인데 굳이 그다음 날까지 쉬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싶었으나, 직장인의 소소한 낙이 될 수도 있는 일이니, 어디까지나 그것은 그의 권리이니까 더 이상의 간섭은 하지 않기로 했다.

그나저나 그날은 아이들 개학이라 집에 나 혼자만 있는데 이를 어쩐담?

이게 다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리란 말이오.

아직 닥치지도 않은 그날이 두려워진다, 벌써부터.


"아빠, 그날 왜 쉬어? 회사 안 가?"

"응. 하루 쉬려고."

"우린 그날 개학인데, 아빤 좋겠다."

"너희는 그동안 방학 때 잘 쉬었잖아."

"너무 짧았어."

남편과 아이들은 서로의 어떤 날들에 대해 부러워하고 있었다.

철없는 어린것들은 어느새 바짝 다가온 개학날에 아쉬운 마음을 감출 수 없었고, 이와는 대조적으로 아직 하루 쉬겠다는 의사 전달도 하지 않은 어떤 남성은 벌써부터 설레고 있었다.

아이들도 없는데 그 남성과 내가 집에서 둘이 뭘 하고 지낸단 말인가.

쉬고 싶다고 무조건 다 쉴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바쁜 일이 있으면 제지당할 수도 있으니까, 나에게도 아직 희망은 있었다.


작년에 내가 일을 그만두고, 남편도 1월부터 육아휴직을 시작한 후 아이들이 등교하고 나면 달랑 우리 부부만 남았다.

뜻하지 않게 '황혼부부 체험'을 했다.

아이들도 없이 남편과 아내가 둘이서만 남게 된 상황, 갓 결혼한 신혼도 아닌 사람들이 집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특별할 것도 없었고, 다양하지도 못했다.

나는 항상 할 일이 많아 동동거렸고, 누군가는 여유로워 보였다.

결국 각자 할 일에 집중했다.

가끔 휴직자는 마늘을 까고 콩을 까고 양파 껍질을 까고 과일 껍질을 깎았다.

휴직하는 동안 간간이 이어진 그의 공로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휴직자의 소일거리의 8할은 까고, 깎는 일이 전부였다.

그러나, 이제 싹이 겨우 움트고 꽃이 피려면 아직도 멀었는데 어디서 콩깍지를 공수해 올 것이며 지난해 수확한 마늘은 이미 다 다져진 상태로 냉동실에 들어가 있는 마당에 아내 입장에서 그 직장인에게 무엇을 내밀어야 좋을까.


억만 겁의 시간보다 더 길게 느껴질 그 목요일 하루를 나는 그와 어떻게 보내야 한단 말인가.

엄밀히 말하자면 '함께'는 아닐 것이다.

평소처럼 나는 나대로 할 일을 하고 남편도 나름 시간을 보낼 것이니까.

그러나 나는 다만 걱정스러운 것이다.

오래간만에 하루 쉬는 직장인은 (과거의 경험을 비추어 보아) 내가 하는 일에 간섭을 하고 대화를 시도할 것이며 시간이 남으면 기습적으로 살림을 들춰보며 잔소리하는 것도 서슴지 않으리라.

대화를 시도하려는 자와 이를 피하려는 자, 전혀 소꿉놀이만큼 재미있지도 않은 풍경이 벌써부터 눈에 선하다.

작년에 나는 비로소 알게 됐다.

경험상, 남편이 집에 있으면 늘어나는 것은 잔소리요, 줄어드는 것은 가정 평화의 시간이다.

퇴직을 하고 남편이 집에 하루 종일 아내와 있게 되면 싸움도 잦아지고 서로 자주 부딪치게 된다더니, 과연 그러했다.

(황혼 체험) 부부에게 하루는 길었다.

나이가 들 수록 나는 남편과 덜 부딪치려고 말을 줄여갔고, 남편은 말이 더욱 많아졌다.

단순히 말을 적게 하는 것으로 충돌을 줄이는 것은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었으나 어느 면에서 지나친 간섭을 받게 되면 일단 그 상황이라도 벗어나고자 했던 것이 그런 결과를 낳았다.

무엇이든 적당한 게 좋으련만 그 적당히를 서로는 잘 알지 못하는 듯했다.

가장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말을 적게 하면 확실히 다투는 일도 줄었던지라(대화가 길어지다가 자칫 말다툼을 하기도 일쑤였으므로) 나는 가끔 아예 말을 안 하다시피 하기도 했고, 남편은 그게 불만스러워 더욱 말을 많이 하게 되기도 했던 것이다.

세상에 부작용 없는 일은 결코 없었다.

12년간 남몰래 축적해 온 나만의 '스몰 데이터'를 바탕으로 추론해 보건대 대강 이러하리.

하루의 연가는 출근하지 않는 남편을 낳고, 그 남편은 집안일에 간섭함을 낳고, 간섭은 냉장고 기습 점검을 낳고, 기습 점검은 잔소리를 낳고, 계속되는 잔소리는 부부 싸움을 낳고, 부부 싸움은 가정불화를 낳고...


"사람들이 쉬다 나오니까 다들 출근하기 싫다고 그런 말 하더라."

"그렇겠지. 쉬었다 나오면 더 나오기 싫지."

연초부터 3월의 첫날을 기다려왔던 우리 집 직장인은 어젯밤에도 사회생활의 고단함을 풀어놓았다.

갑자기 하루 더 쉬겠다고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미리 알았더라면 마음의 준비라도 할 수 있었을 텐데.

아이들 하교할 때쯤 오랜만에 마중이라도 가야겠다.

아니면 아이들이 학교에 갈 때 나도 같이 집을 나서도 좋으리라.

아무리 서로 말을 않고 각자 할 일을 한다고 하더라도 집에 사람이 있고 없는 것은 차이가 있다.

남편이 집에 있으면 괜히 신경이 쓰인다.

각별히 보살펴 주는 것도 아니건만, 지극한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건만.

지금은 관심보다 적절한 무관심이 더욱 필요할 시기다.

각자 서로의 시간을 인정해 주면 그만일 일인데, 결코 쉬운 일도 아니다.


오랜만에 동네 순찰이라도 나서야겠다.

어슬렁어슬렁 현재 신분에 맞게 거리를 배회해도 좋겠지.

사람이 눈앞에 보이면 말을 걸고 싶어 지는 게 자연스러운 거니까 차라리 서로 혼자만을 시간을 갖자.

나는 집 밖에서, 직장인은 집 안에서.

사람이 혼자 있고 싶을 때도 있는 법이고 아무런 방해도 받고 싶지 않은 날이 있기 마련이다.

하루 쉬겠다고 한 것은 그런 마음이 동해서 그런 게 아닐까.


반나절이라도 온전히 직장인이 푹 쉴 수 있도록 오전 내내 집을 비워주는 일, 내가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이다,라고 나는 가만히 혼자서만 생각했다.

어떤 거리두기는 끝났지만, 부부 사이의 거리두기는 영원히 지속돼야만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는 바이다.

그리고 또 다짐했다.

출근도 안 하는데 낮 12시가 넘도록 이불에서 벗어나지 못하더라도 깨우지는 말아야지.

나 혼자서는 택도 없는, 몇 달 전부터 위치를 바꾸고 싶은 커다란 화분을 같이 좀 옮기자고 절대 절대 운도 떼지 말아야지.(사실 몇 차례 거절 당했었다.)

무조건 나가야지 나는.

다행히 집안에만 있기엔 너무 아까운 봄날 같은 날씨가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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