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는 구석이 있어서

세상에 믿을 사람이 있을까?

by 글임자
23. 3. 24. ²

< 사진 임자 = 글임자 >


"다음 주에 신분증 꼭 챙기라고 말해."

대꾸하지 않았다.

"신분증 없음 완전 끝장이야."

역시나 대꾸하지 않았다.


나는 소망한다, 스스로 어른이, 스스로 남편을...

"내가 언제까지 일일이 그런 걸 다 챙겨줘야 돼? 내가 있어도 없다고 생각하라니까!"

라고 대응했던 것은 호랑이가 담배 씨 뿌리던 까마득한 기원전 5,000년 경의 일이다.


"나도 챙기긴 할 건데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자기도 기억하고 있어. 알았지?"

그가 뭔가 중요한 일정을 앞두고 있을 때면 으레 내게도 통보함과 동시에 어떤 의무를 지워 준다.

'나도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한다.'는 식의 '내가 당연히 챙겨야 한다'는 식의 사명감 그런 것들 말이다.

물론 그가 왜 그러는지는 잘 안다.

행여나 싶어서이다.

만에 하나, 그 불안감에 나까지 그 스케줄에 꽁꽁 묶어 둔다.(고 나는 생각한다. 겉으로는 내색않지만 어떤 통보를 받고 나면 나도 꽤 신경을 쓰는 편이다.)

그런 게 뭐가 어려운 일이라고 그러나 싶을 테지만 솔직히 걱정이 된다.

내가 언제까지 같이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우리는 불확실한 시대에 살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우리 사이란 것이 앞일을 모르는 것 아닌가?) 자꾸 나에게 의지하는 것으로 비쳐지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혼자가 될지도 모르는 일인데 지금부터라도 혼자 사는 법을 서서히 익혀나가면 좋지 않을까?

갑자기 혼자가 되었을 경우를 대비해서라도 말이다.

어느 날 휑덩그레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에 망연자실하며 당황하기 전에 차근차근 연습 삼아서.


밖에서 보면(같이 살아보지 않으니 알 턱이 없겠지, 당연히) 멀쩡한 직장인이다.

"사람이 착하고 성실해."

라며 전 사무관님이 입에 침이 마르지 않을 정도로만 칭찬을 하실 만큼 나름 번듯하고 일도 제법 잘해 나간다고 그는 늘 주장해 왔다.

가끔

'저 사람이 직장 생활은 잘하고 있는 걸까?'

싶을 때가 있긴 하다.

물론 나에 대해서도 그가

"그래가지고 직장 생활은 어떻게 해?"

라며 단도직입적이고도 다소 저돌적으로 질문하던 때가 있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나 자신도 직장생활을 어떻게 해 나갔는지 갸우뚱거려질 때가 있다.

그래도 매일 아침 출근하고 저녁에 퇴근하고 한 달에 한 번씩 월급을 받는 그의 모습을 보면 신통방통하기까지 하다.


"나도 메모해 놨으니까 자기도 기억하고 있어!"

그는 내가 흘려 들을까 봐 재차 강조한다.

대꾸하지는 않은 대신 조용히 캘린더에 일정 하나를 추가했다.

'행여나', '만에 하나' 싶어서이다.

아마도 그는 믿는 구석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나도 그리 믿을 사람이 못된다는 것을 세상 그 누구보다도 그가 잘 알 터인데, 나도 내가 불안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래 한 번 더 일정을 추가하자.

다 안다, 그가 고생 많이 하고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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