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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임자 Apr 12. 2023

첫 부추, 믿음이 없으시구랴?

할머니가 생각나는 봄

< 사진 임자 = 글임자 >

2023. 4. 6. 올 봄 새 부추


"이거 올해 처음 수확한 거야. 진짜 싱싱하고 좋지? 많이 좝솨~"

"그래. 부추가 몸에 좋다니까 많이 먹어야지."

친정 로컬 푸드 중 에서 올해 처음 수확한 부추를 한 줌 내어주며(그것도 날 것 그대로, 원시 상태 그대로가 가장 좋은 것이라며 내가 항상 우겨왔으므로,  남편도 이에 완전히 설득당했으므로) 남편에게 강력히 권했다.

몸에 좋다는 것은 일단 먹고 보는 마흔 하고도 한 살이 된 그는  풋내 나고 매운맛이 살짝 도는 새파란 것을 와구와구 잘도 드셨다.


"봄에 처음 나는 것은 다 좋대. 겨우내 땅속에 있다가 봄에 언 땅을 뚫고 나온 것은 보약이래 보약. 그러니까 줄 때 많이 드셔."

"에이~ 그런 게 어딨어? 처음 나는 거라고 다 좋은가 뭐?"

"어디 기사에서도 봤는데? 땅속에 있을 때 영양분을 모으고 있다가 봄에 처음으로 새로 나온 거니까 두 번째나 세 번째 보다도 더 좋다고 하던데?"

"그냥 하는 말이지 뭐. 그런 걸 또 믿어? 하여튼 자기는 자기 집에서 가져온 건 다 좋다고 하더라."

좋으니까 좋다고 하지, 친정 로컬 푸드를 챙겨 올 때마다 가장 먼저 맛보시는 양반이 이게 무슨  처가 말뚝에 절하다 말고 항의하는 상황이람?

새봄에 새로 나온 신선하고 연하디 연한 그 부추를 보고 기특해하며, 또한 입맛 다시며  나는 남편에게 그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가를 일장연설해 왔다, 결혼한 이래 지금까지.

그러나 남편은 내가 하는 말이라면 뭐든 못 미더워하는 사람이라(그렇게 나는 생각한다.) 허투루 듣기 일쑤였고 '어디서 이상한 소리나 듣고 왔다.'라며 콧방귀도 안 뀌곤 했다.

흥, 옛날 여자친구는 그런 얘기도 안 해줬었나 보지?

"그래! 믿는다 믿어. 내가 당신은 안 믿어도 그 말은 정말 믿어. 설사 유언비어라고 해도 다 믿어버릴 거야 평생!"

이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물론.

부추가 몸에 좋다는 건 인정하지만 봄에 처음 수확해 먹는 부추가 정말 좋다는 데에는 결코 쉽사리 동의하지 않는 양반.


지난주 이틀간 내린 비를 맞고 싱그러움을 한껏 뽐내던 부추가 제발 이제는 좀 거두어 달라고 애원하고 있었다.

그동안 친정을 오가며 눈독 들이고 있었는데 드디어 때가 온 것이다.

겨우내 얼어 죽지 않고 용케도 잘 견뎌서 올해도 어김없이 고개를 내밀었다.

그것은 10년도 전에 돌아가신 할머니가 심은 것이다.

우리 친정식구들은 육식보다는 채식을 더 즐겨하는 편이다.

시골이라 어지간한 야채는 다 심어서 먹는데 유독 부추는 가족들에게 인기가 많다.

할머니는 부침개를 좋아하셨는데 내가 그 부추를 베어다가 휘리릭 전을 부쳐내면 연신 맛나다 하시며 잇몸만 남은 쭈글쭈글한 입으로 오물오물 드셨다.

아빠는 부추 겉절이를 좋아하시고 난 부추가 들어가면 뭐든 다 좋아한다.

내 아이들도 아기 때부터 먹어오던 것이라 거부감 없이 잘 먹는다.

물론 그 마흔한 살의 어떤 남성도 그에 뒤지지 않는다.

그는 결혼 후 나의 강력한 라이벌이 되었다.


텃밭을 오가며 그 부추를 볼 때면 나는 할머니를 보듯 한다.

할머니는 부추를 심고 종종 불을 피운 후 타고 남은 재를 뿌리고 자잘한 숯 조각 같은 것도 대충 던져두셨었다.

가끔 부추가 다 자라 베어낼 시기가 되면 그 재 때문에 깔끔하게 수확이 되지 않아 애를 먹었지만, 도대체 그런 것들을 거기에 뿌리는 이유가 뭔지는 모르겠지만(설마 부추에게 해로운 것은 아닐 테지, 최소한) 기분 탓인지 몰라도 그것들이 있어 더 잘 자라는 것 같기도 한 착각에 빠질 때가 있다.

할머니는 돌아가시고 안 계시지만 이젠 부모님이 할머니를 대신해 재를 뿌리고 숯 조각을 얹어두신다.

어린(결코 어리지는 않은) 나는 잘 모르는 어른들의 세계가 있는 법이다.

굳이 과학적인 근거나 확실한 증거 같은 것은 따져 묻지 않아도, 설사 그것이 잘못된 신념이라손치더라도 우리에게 해를 입히는 것은 아닐 테니까 나는 다만 어른들의 행동을 눈여겨볼 뿐이다.


우리 할머니 손등은 검버섯이 잔뜩 피고 새까맣게 그을리고 바싹 말라 쭈글쭈글 마른 귤껍질 같았는데, 부추 뿌리 근처로 아무렇게나 뿌려진 그 재는 언제나 보드라웠다. 이제는 손으로 만져볼 수 없는 그 거친 손을 쓰다듬듯 엄지와 검지로 살짝  재를 집어 들곤 한다. 그럴 때면 할머니의 왜소한 그 몸집이 한 줌의 재가 된 듯 고운 가루로 부드럽게 바람에 날렸다.


봄비를 촉촉하게 흠뻑 맞고 눈에는 잘 보이지 않는 재들은 아마도 고운 흙 속에 섞여 들었을 것이다. 말간 그 부추 얼굴을 보고 있노라니 할머니가 어서 한 줌 베어다가 부침개 좀 부쳐보라며 재촉하는 것만 같다.

상추랑 섞어서 겉절이며 부추김치도 만들고 부침개도 부치고 데쳐서 나물로 무쳐도 먹고 잡채도 해 먹고, 생각만 해도 배가 부르다.

이렇게 할머니는 또 나를 먹여 살리시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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