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학교에서 그렇게 배웠어?
다섯 살 어린이에게도 배울 점이 있으면 배워야 한다고 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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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임자
Mar 24. 2023
23. 3. 20. 그림 임자=합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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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임자 = 글임자 >
"엄마, 네이비가 뭐야?"
"응? 남색?"
"그거 말고. 네이비."
"해군 말하는 거야?"
"몰라. 아무튼 네이비가 뭐야?"
"둘 다 스펠링은 같은 것 같은데, 발음이 달랐었나? 요즘은 해군 발음할 일이 없어서 안 했더니 정확히 기억이 안 나네.
언어는 진짜 안 쓰면 금방 잊어버린다니까.
한 번 찾아서 발음 들어 봐. 엄마도 확인해 봐야겠다."
"알았어. 근데 엄마 발음이 왜 그래?"
느닷없이, 얌전히 나는 내 영어 공부를 하고 있을 뿐이었는데 갑작스레 딸에게 발음 지적을 다 당했다.
우리 집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다.
발음이 이상하네, 스펠링이 틀린 거 아니냐, 그게 정확한 거냐, 강세가 틀렸다, 도대체 학교 다닐 때 어떻게 배운 거냐(이건 솔직히 열두 살짜리가 마흔네 살짜리에게 할 말로는 부적절한 언행이 아닌가?) 이런 식으로 나를 압박해 오기 시작했다.
"엄마, 릴레이션칩이 뭐야?"
"릴레이션쉽 말이야? 그건 릴레이트를 릴레이션이라고 먼저 명사형으로 만든 다음에 거기에 쉽이 붙은 건데, 관계란 뜻이야."
"난 릴레이션칩이라고 들리는데?"
"쉽이라고 들리는데? 스킨쉽, 프렌~ㄷ쉽, 이런 말 안 들어봤어? 그거 들어간 단어 많아. 발음은 '쉽'에 가깝지만 표기할 때는 '십'이라고 하는 것 같던데, 그것도 찾아봐야겠다 정확히."
"난 칩이라고 들려."
"그래? 그럼 한 번 사전 찾아서 들어 봐. 엄마도 확인해 봐야겠다."
"들어봐 엄마, 칩이라고 하는 것 같아."
딸이 학습 중인 사이트에서는 딸 말마따나 약간 그렇게 들리기도 했다.
칩과 십 사이, 그 어드메쯤.
그래도 내 귀에는 '쉽(십)'이라고 들리는 것 같은 느낌적인 그 느낌은 어떻게 설명할 도리가 없다.
늘 그렇듯 시작은 이 정도면 양호하다 싶었다.
"더 드러-ㄱ 메이드 힘 디퍼런트."
정직하고 우직하게 나는 발음했다.
나는 그날 학습할 양을 공부하는 중이었다.
깐깐한 딸이 그냥 넘어갈 리가 없다.
"엄마 디퍼런트가 뭐야?"
"디퍼런트, 다르다는 뜻이잖아! 너도 알잖아?!"
"'디풔어~런트'겠지."
"그래..."
"엄마 발음이 좀 그렇다?"
"엄마 발음이 어때서 그래? 이 정도면 양호하지."
"엄마랑 아빠는 옛날 사람들이라 그런가 발음이 안 좋아."
이러면서 그녀는 내 앞에서 한껏 꼬부랑말 발음을 뽐내기 시작했다.
어마? 얘가 숫제 나를 가르치려 드네?
"역시, 애들은 달라. 우리랑 차원이 달라. 우리 때만 해도 이렇게 발음 안 하고 배웠었는데."
이쯤에서 결코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이 있었으니, '옛날 사람 1호' 바로 남편이다.
그 사람이 거기 있었나 싶게 존재를 확인할 길 없다가 내가 뭔가 불리한 상황에 놓일 때면 귀신같이 나타나서 없던 일도 무슨 일이 생기게 만드신다.
"'우리'라고 하지 마. 난 아니야. 나까지 포함해서 그렇게 말하지 마! 난 자기랑 달라."
한꺼번에 같은 부류도 묶이고 싶지 않아 발버둥 치는 이는 짐작대로 '옛날 사람 2호', 바로 나다.
"그래도 엄마가 아빠보다는 조금 더 나은 것 같긴 해."
딸이 결코 제 부모가 같은 부류가 아님을 공고히 했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럼. 당연하지!"
초등생 딸에게 어떤 확인을 받은 '옛날 사람 2호'는 뿌듯함마저 느꼈다.
이번에도 남편과 선을 확실히 그었다.
"엄마가 낫긴 뭐가 나아? 아빠랑 비슷하지 뭐."
졸지에 어떤 순위가 뒤로 밀려난 '옛날 사람 1호'가 그냥 넘어가는 법 없이 이의를 제기하며 발끈하셨다.
"맞아. 엄마나 아빠나 둘 다 발음은 별로야. 특히 b 하고 v 하고 구분을 안 하고 무조건 b로만 발음해. f도 p랑 구분 않고 무조건 p로만 발음하고."
옛날 사람 둘의 '결실 1호'가 따끔하고도 정확히 조금의 자비심도 없이 문제점을 꼬집었다.
그러면서 윗니로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떼는 묘기도 보이신다.
옛날 사람 1호와 2호는 금세 시무룩해졌다.
"그래, 엄마랑 아빠는 누나보다 더 발음이 안 좋아!"
아직
알파벳도 다 떼지 못한 데다가 한글도 가끔 엉뚱하게 쓰는 열 살짜리 '결실 2호'가 (낄 자리가 전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 틈을 놓치지 않고 기꺼이 출현해 주시는 일을 잊지 않으셨다 물론.
하지만, 딸아.
절대 오해하면 안 되느니라.
엄마가 몰라서 그러는 거 절대 아니야.
일종의 자극 요법이라고나 할까?
일부러라도 엄마가 틀려주면 네가 옳다고나 하면서 잔뜩 아는 체하는 거 그거 보려고 그러는 거야.
네가 더 알아와서 나도 가르쳐 주잖아.
은근히 너의 '학습의욕을 고취시켜 주기 위해서',라고 한다면 믿겠느냐?
아,
정말 이 방법,
알면서도 일부러 그런 건데 어떻게 표현할 방법이 없네.
초등 교과 과정에서 3학년에 정식 교과로 영어 과목이 있지만 그때는 전혀 흥미를 못 느끼더니 작년에 가족 모두 공부하는 영어 사이트에 가입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재미를 느낀 듯했다.
너무 흥미 없어하길래 잠자코 1년을 지켜보았는데 나중에라도 관심을 갖고 재미를 붙여 매일매일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하는 중이다.
그래, 발음은 네가 더 좋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단어는?
숙어는?
영작은?
영어 속담은?
문법은?
유치하게 딸과 대결해 보려다 조용히 의지를 꺾었다.
섣불리 대응했다가 낭패를 볼지도 몰라.
l과 r 의 발음 차이를 아느냐고 나를 시험에 들게 하기 전에 이쯤에서 그만하자.
그냥 가끔 지적해 주는 대로 교정받고(?) 당해 주자.
남도 아니고 내 딸인데 뭐.
겪어볼수록 딸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결코.
"근데 네이비를 대문자로 검색해 봤더니 '너 다시는 자원(자청) 하지 마. 이런 뜻이라네. Never Again Volunteer Yourself. 앞 글자만 따서."
"아, 그래?"
너는 이런 거 모르지?, 용용 죽겠지 식의 얄팍한 우쭐함으로 내가 아는 체했으나 딸은 시큰둥했다.
"이런 뜻이 있는 줄 몰랐는데 우리 딸 덕분에 새로운 걸 알게 됐네."
"근데 엄마, 네버가 뭐야 네버가. 눼~붜어ㄹ~겠지. b가 아니라 v잖아."
정말 맞다.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만만치가 않어...
비로소 그날 나는 또 선조들의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조언 한 마디를 뼈저리게 경험했다.
'애들 앞에서는 발음도 함부로 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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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넣으면 당연히 아프죠
03
그리고, 넌 나랑 붕어빵이겠지?
04
엄마가 너덜너덜한 생선을 발라 먹었더니
05
엄마는 학교에서 그렇게 배웠어?
06
엄마의 성장통
07
엄마 정성이 들어갔나요?
눈에 넣으면 당연히 아프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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