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1. 10. 진심, 은 아닌 것 같다
< 사진 임자 = 글임자 >
그 거짓말 참말이야?
사랑한다는 그 말도.
나의 선택을 언제나 응원한다는 그 말도.
모두 새빨간 거짓말 아니야?
대답을 해, 나의 기쁨, 나의 고통아.
<사건 발생 일시>
2022년 1월 10일 월요일 밤 11시가 다 되어갈 무렵,
퇴근해서 집에 도착했을 때 남편이 꽃다발을 내밀었다.
어리둥절하다, 대관절 이게 무슨 상황인가.
이틀 전이 결혼기념일이었는데 이제 와서 수습하려는 셈일까.
갈등이 극에 달했을 적에 하루에 한 마디조차 주고받지 않던 그 어느 때보다도 나와 남편 사이는 최악이었던 시기였다.
1월부터 육아휴직을 시작했고, 그날 아침 출근 준비를 하는 내내 방에서 얼굴 한 번 내밀지 않던 그였다.
진작에 일어났을 거다.
내가 일을 그만둔다는 말에 마지못해 동의하긴 했지만, 아마도 밤새 잠 못 이뤘을지도 모르지.
보험 하나 팔 생각에도 온 신경을 곤두세우며 미리부터 전전긍긍하던 성격이다.
전날 일요일에 우린 일단 의원면직을 결정하고, 나는 월요일에 출근을 하면 바로 사무실에 말씀을 드리겠다고 했고, 일하는 중간에 그 경과를 남편에게도 알렸다.
퇴근하고 집에 와 보니 '저런 걸 꽃다발이라고 하는가 보다' 하는 물건과 함께 남편은 아이들까지 동원해서 치즈케이크를 준비해 놓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꽃을 좋아하고 식물을 좋아하지만 꽃다발은 좋아하지 않는다, 그다지.
예뻐하기는 한다.
뭔가 앞뒤가 안 맞는 것 같기도 하지만, 오랫동안 돌보면서 키울 수 있는 화분을 선호하는 편이다.
결혼 전 당시 남자 친구이던 남편이 느닷없이 내가 처음 발령받은 면사무소로 꽃다발을 보내온 적이 딱 한 차례, 우리 가족 역사의 페이지에 기록될 만하게 있긴 했다.
왜 갑자기 꽃다발 선물을 한 건지 기억도 가물가물한데, 쓸데없이 시키지도 않은 짓은 왜 했냐며 괜히 버럭 했던 기억은 선명하다.
그때가 발령받고 얼마 되지도 않았을 때라 모르는 게 있어도 누구한테 물어보지도 못하고 혼자서만 끙끙대던 시절이었는데. 행동도 조심스럽고 사무실 직원들 모두가 어렵기만 했는데 말이다.
당시 그는
"다른 여자들은 좋아하던데."
이러면서 왜 나는 타박만 하냐고 도리어 더 신경질을 냈던 거 저세상 가서도 안 잊을 거다.
소중한 기억이니까 간직해야 마땅하다.
전 여자 친구가 좋아했었나 보지.
하여튼 그는 '다른 여자들' 무지하게 좋아한다.
직장 다니면서 경제활동도 잘하시고, 아이들도 남보란 듯이 잘 키우시는(데다가 심지어 나중에는 '남편 뒷바라지까지도 잘하더라'라는 차마 입 밖으로 아니 나와 야 할, 비극 밖에 더는 부를 일 없는 그 엄청난 말까지 내뱉어 버리기도 한다) 남의 집 '다른 여자들' 말이다.
남자 친구가 별 특별한 날도 아닌데 굳이 여자 친구 직장에 꽃다발을 보내와 놀라게 하면, 상상도 못 했다는 듯이 감격에 겨워 과장되게 몸 둘 바를 몰라하며 기쁨을 표현하는 그런 '다른 여자들', 바로 그 문제의 여자들.
내 주변에선 눈 씻고 찾아봐도 볼 수 없는 전설의 그 여자들.
사실 그 여자들 속은 썩어 문드러졌을지도 모른다 알고 보면.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지 말래두?'
그 여자들도 사람이면 저 어마어마한 세 가지를 다 잘해 낼 수는 없는 일이야.
어떻게 다 잘할 수가 있겠어.
난 그렇게 생각한다고, 남편.
알아, 나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거.
그냥 나의 정신 건강을 위해서야.
그렇게 생각한다고 해서 내가 법을 어기는 것도 아니잖아?
나만 아니면 되는 거지?
남자 친구는 나를 제외한 '다른 여자들'을 지나치게 좋아하지만, 다른 여자들 입장도 생각해 줘야지.
그런 다른 여자들은 저런 남자 친구 안 좋아할 수도 있다고.
그 여자들도 이상형이란 게 있고 취향도 있을 텐데 분명히.
다른 여자들 그만 좋아하는 게 좋겠어, 그러니까.
어쨌든 그 이후로 남편은 꽃다발 사는 일 같은 건 절대로 하지 않는 일관성을 보여주었다.
이런 글을 쓰게 되려고 저 사진을 남겨놓았던가.
'증거자료 1'로 채택한다.
무려 13년 만에 받아보는 꽃다발.
그때 그 남자 친구가 지금의 이 남편 맞다.
나도 일관성 있게 한 남자만을 상대해 왔구나.
그 말인즉, 2009년 처음 그에게서 꽃다발을 받아보고, 결혼기념일, 생일, 무슨 날 이런 때에 나는 꽃다발 구경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저 '증거자료 1'을 확보하기 전까지는.
세상에는, 믿기 힘든 일이지만, 설마설마했는데, 나는 결혼 후 처음 받아봤지만, 놀랍게도 종종 아내에게 꽃다발을 선물하는 남편이 있다고 한다.
'난 꽃다발보다는 화분이 더 좋다'라는 그 말 한마디에 남편은 쾌재를 불렀을까.
그날 이후로 우리 부부가 꽃을 주고받는 일은 없었다.
꽃은 보기만 하는 거야.
주고받는 거 아니야.
아무렴.
아, 남편도 한다면 하는 사람이었구나.
어쩌면 저리도 일편단심이란 말인가.
꽃다발은 별로라는 아내의 말에 '절대 꽃다발 같은 선물'따위는 장만하지 않으리라 굳게 마음먹은 사람이 바로 저 남자다.
'아니, 이게 다 뭐야? 지금까지 안 자고 뭐 해? 왜, 괴로워서 술 마셨어? 웬 꽃을 다 샀대?"
"무슨 소리야. 나 술 안 먹었고 멀쩡해."
"애들은 왜 아직까지 안 자고 있고?"
"자기가 안 왔으니까 올 때까지 기다렸지. 그런데 이렇게 늦을 줄 몰랐지."
"근데 이것들은 다 뭐냐고?"
"응, 오늘 자기 그만둔다고 말했다길래 샀어."
"말만 했지 아직 다 처리된 것도 아닌데?"
"어쨌거나 이제 말까지 해버렸으니까."
"그래. 뭐 슬슬 진행은 되겠지. 그나저나 애들은 왜 안 자고 있어?"
이 사람이 육아 휴직해 놓고 이러면 안 되지.
내가 지난 3년 동안 공들인 게 있는데 순식간에 이렇게 무너뜨려 버리면 어쩌라고 나보고.
"애들은 늦어도 9시 30분까지는 잘 준비해야 한다니까 그러네."
"알았어. 오늘은 자기 기다리느라 그런 거야. 내가 자기 좋아하는 치즈 케이크도 샀어."
그 와중에도 내 취향까지 고려하는 치밀함을 보이는 나의 기쁨.
내가 치즈 케이크를 좋아한다는 사실도 최근에 안 남편이다.
지금이라도 알았으면 됐지. 그게 어디냐.
보이긴 한다.
남편 얼굴보다도 그게 더 먼저 눈에 띄었다.
그런데 크기는 또 왜 저렇게 큰 걸로 산 거야.
앞으로 이제 외벌이로 살려면 이전만큼은 못 할 텐데.
굳이 저렇게 큰 걸로 장만할 건 뭐람?
"근데 뭐 하러 저렇게 큰 걸로 샀어. 그냥 작은 걸로 사지."
"사줘도 뭐라고 하는구먼. 자기 좋아한다고 특별히 제일 큰 걸로 샀는데."
"고맙네. 고맙긴 한데 이젠 기분 내키는 대로만 살 순 없으니까."
"아이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일 그만두겠다고 했소?"
"그만두는 건 그만두는 거고, 그리고 이미 그건 결정 났잖아. 이거랑은 별개지. 또 왜 이러실까?"
"그럼 내일 가서 다시 취소할래? 잠깐 정신이 나가서 헛소리했다고?"
지금 그게 말이야 막걸리야?
말 같은 소릴 해야지.
나 농담할 기분 아니다.
나도 그렇다. 돈도, 직장도 다 필요 없소 할 땐 언제고 당장 케이크 좀 큰 거 샀다고 남편에게 싫은 소릴 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당장 현실을 직시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우리 형편에 맞게 이젠 적응해 나가며 살아야 할 필요가 있다, 기분 내키는 대로 살아서는 안된다, 그런 의미이다.
내가 직장을 계속 다니고 안 다니고 그런 것과는 상관없다.
남편도 잘 안다. 결혼 전부터 그런 얘기를 항상 해 왔다.
물론 케이크 하나 사는 거 그것 가지고 뭐라고 하는 게 아니다.
사는 것까진 좋지만 굳이 우리 형편이 어쩌네 저쩌네 따지는 건 별개로 하더라도, 현명하게 사야 한다는 말이다.
배고파서 배 채우자고 먹는 케이크도 아니고 그냥 남편 말마따나 그날을 좀 특별하게 만들어 보고 싶었다는 의미라는 것을 잘 아니까, 시늉만 내면 됐지 그런 생각인 거다.
꽃다발도 이쁘긴 하다.
이쁜 것들은 비싸다.
학교에서 배우지 않았어도, 교과 과정에 안 들어 있어도 직감적으로 안다.
굳이 그렇게까지 꽃다발에 공들일 필요가 없다, 이 말이다 내 말은.
하지만 남편은 그날 뭔가 내 눈에 보여주고 싶은 게 있었음에 틀림없었다.
나도 속에서 올라오는 것을 꾹 억눌렀어야 했는데, 눈치 없이 관성의 법칙이 작용해서,
"근데 꽃다발은 또 왜 저렇게 요란한 걸 샀어?"
"진짜 사줘도 뭐라고 하네. 앞으론 다시 안 사!"
잘 나가다가 불화 모드로 돌아서려는 거 보니까 우리, 부부 맞다.
내가 사달라고 하지는 않았다.
남편이 본인 기분에 그냥 사 온 거지.
말은 똑바로 하자.
본인이 사고 싶어 사놓고 나보고 안 좋아한다고 뭐라고 한다.
이건 흡사, 엄마 욕심에 남들 다 본다는 말에 혹해서 이것저것 전집 사서 책장 가득 꽂아놓고 아이 보고 안 읽는다고 타박하는?
엄마가 샀잖아요. 아이가 사달라고 눈물로 호소했을 리는 없다고 생각해요.
메모까지 곁들여 있다.
그런 거 잘은 모르지만 백 원이라도 더 줘야 했을 것이다.
"골고루도 섞어 놨네. 이런 건 진짜 비쌀 텐데."
꽃다발을 사 본 적도 받아 본 적도 거의 기억에 없는, 그런 세상의 물정을 전혀 모르는 나다.
잠시 마트에서 한 움큼도 안 되는 안개꽃에 칠천 원이라는 가격표가 붙어 있는 것을 보고 와서는 남편에게 비싸다며 호들갑을 떨었던 기억이 났다.
바깥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알지 못하는 나지만 어설프게나마 계산을 해 본다.
안개꽃 수준도 아니고 (내 눈에) 이쁜 것들은 다 모아놨으니까 한 3만 원? 4만 원 정도?
그것도 비싼 거 아닌가?
당장 수입이 반토막 났는데, 굳이 저런 데 지출할 필요가 없는데 싶었다.
혼자 셈해 보다가,
인심 크게 썼다.
"이거 한 3만 5천 원 정도 줬어?"
남편이 콧방귀를 다 뀐다.
뭐야 그럼 더 비싸단 소리야?
제정신으로 산 거야 , 지금?
형식이 뭐가 중요해?
우리 형식에 너무 얽매이지 맙시다.
진심인 마음만 있었다면 그냥 장미 한 송이 사서 손 편지나 써서 줄 일이지.
이런 식으로 겉치레만 하다간 살림 다 거덜 나겠다.
누가 공무원 아니랄까 봐, 사람이 말이야, 형식주의에만 빠져가지고는 말이야.
실속 있게 살아야 할 거 아니유.
"자긴 이렇게 세상 물정을 몰라."
"아이고, 자기가 계속 육아 휴직하다가는 살림 다 말아먹겠다. 나 그동안 살림하는 거 보고 배우랬잖아. 그렇게 살림하는 거 아니야. 내가 하니까 쉬워 보였지? 꼭 필요한 곳에 적당한 돈을 써야 하는 거야. 합리적인 가격에, 그 만한 돈을 지불할 가치가 있는 곳에 말이야."
"그러니까 앞으론 안 살 거라니까. 이번이 마지막이야. 사주고도 좋은 소리 못 듣고."
"근데 저 메모는 뭐야?"
"아 이거? 내 마음이야."
진짜 맨 정신으로는 절대 못할 소리 잘도 한다.
막 나가자는 건가?
내가 일을 그만둔다고 해서 충격이 컸구나.
빚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다.
나의 기쁨, 나의 고통에게 나도 선물을 할 때가 됐다.
오는 꽃다발, 가는 음주 측정기.
가정용 음주 측정기를 조만간 마련해야겠다.
"사람이 이렇게 거짓말하면 안 되지. 얼마나 침을 많이 발랐는지 입술이 없어졌구먼."
"무슨 소리야?"
"일단은 나를 사랑한다는 그 말."
"그 말이 왜?"
"그리고 뭐? 언제나 내 선택을 응원한다고?"
"그럼!"
"그렇게 응원한다는 사람이 어제까진 그렇게 난리를 치면서 반대했어? 난 진심으로 안 느껴져."
"아니야. 진심이야. 그렇지 얘들아? 우린 엄마가 앞으로 어떤 선택을 하든지 응원해 줄 거지?"
"응. 엄마. 진짜야."
철 모르는 어린것들을 데리고 오후 내내 연습했나 보다.
아직까지는 주입식 교육이 먹히는 나이들이다.
하루아침에 태도가 360도 바뀌다니, 남편에게 갱년기가 도래하고 있다고 추측해 본다.
노력이 가상하다.
혹시라도, 만에 하나,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진심일지 모르니까, 이쯤에서 넘어가기로 한다.
어떤 마음으로 그것들을 준비했을까 생각해 보니, 남편 마음도 착잡했겠다.
그 속이 속이 아니었을 텐데.
"근데 저 메모 말이야. 직접 손으로 다 써 주더라."
뭐야?
그렇잖아도 비싸 보이는데 손글씨를 직접 쓰셨다고?
그럼 가격이 더 올라갔으면 올라갔지 내려갈 리는 없잖아.
내가 이 나이에 굳이 퇴직까지 결심했던 이유는, 가능했던 이유는, 외벌이로도 아이들 길러내고 살림을 꾸려 나갈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도 괜히 저러는 거 아니다.
가끔 터무니없는 가격으로 그 만한 가치도 없는 물건을 사들이는 남편의 행적을 많이 보아 온 터라 중간에 한 번씩 내가 점검을 철저히 할 필요가 있었다.
한 사람이라도 정신을 차려야 한다. 그것도 바짝.
주문을 걸자.
우린 외벌이다, 우린 외벌이다.
참, 3년 전부터 외벌이였구나.
그날 밤 나는 그 꽃다발의 가격이 어느 정도나 되려나 추측하다가, 이런 식으로 남편이 육아 휴직하는 동안에 기분 내키는 대로 살림을 하다가는 가정 경제가 파탄날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한참 동안을 잠자리에서 뒤척여야 했다.
나한테 쓰는 돈에는 인심이 후하면서 본인에게는 인색한 거 아니냐며 한 번씩 잊을만하면 불평하는 남편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합당한 이유를 들었고 남편도 곧잘 인정을 하곤 했다.
나는 정말 돈이란 것을 가치 있게 쓰고 싶은 사람이다.
돈을 많이 쓰고 싶은 사람이 아니라.
이젠 수입이 절반이니 더욱더 그래야 할 것이다.
이랬다 저랬다 변덕 심한 나 때문에 도대체 어느 장단에 맞춰 춤춰야 하느냐고 종종 내게 불만을 표시하는 남편도 쉽사리 잠들진 못했으리라.
남편이 추는 춤 같은 건 보고 싶지 않았으므로 못 들은 걸로 한다.
그렇다고 해서 눈에 불을 켜고 잠자리에서 꽃다발 가격을 검색해 보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이미 사 와버린 꽃다발이고 내가 생각한 금액보다 터무니없이 높다고 해도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이미 지난 일은 자꾸 들추지 말자.
Let bygones, be bygones.
내가 좋아하는 말이다.
남편과 아이들에게도 종종 하는 말이기도 하다.
지난 일은 지난 일대로 흘려보내고, 내일을 변화시킬 수 있는 오늘, 바로 그 시간을 의미 있게 쓰자는 게 우리 집 신조라면 신조다.
어쨌거나,
그날의 치즈 케이크는 살면서 내가 먹어 본 것 중에서 가장 쓴맛이 났다.
처음 알았다.
치즈 케이크에서 일관되게 쓴맛만 날 수도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