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렵고도 쉬운 일
< 사진 임자 = 글임자 >
의원면직을 결심하고 곧바로 다음 조치가 따라줘야 했다.
'사직서 양식'을 찾는 일이다.
새올 시스템에 보면 표준 서식함에 공무원이 사용하게 될 각종 수많은 서식들이 들어 있다.
육아휴직을 할 때도 복직 신청을 할 때도 건수만 있으면 거기를 둘러보고 필요한 서류를 찾아 작성해서 보내면 그만이었다.
예전에 무슨 일인가 보려다가 정확히 어떤 서식을 작성해야겠는지 몰라서 담당자에게 전화해서 물어보면,
"표준 서식함에 있어요."
하고 퉁명스럽게 대꾸하는 직원도 있었다.
그런 전화를 많이 받다 보면 그렇게 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아는 사람 눈엔 눈을 감아도 잘 보이지만, 모르는 사람 눈엔 눈앞에 들이밀어도 안 보일 때가 있는 법이다.
물론 어떤 이는 어디 몇 페이지쯤에 '제목까지 정확하게' 찾아주고, 서식을 작성해서 메일로 보내 달라든지, 우선 급하면 메일로 먼저 보내고 원본은 나중에 보내줘도 된다며 공무원의 의무 중' 친절의 의무'를 성실히 수행하기도 하여, 같은 직원이지만 그를 올해의 친절한 공무원으로 추천해야 마땅하다고 느낀 적도 많았다.
예나 지금이나 공무원들 중에서 불친절한 공무원은 극히 일부다.(라고 나만 생각한다.)
친절한 말 한마디는 상대가 더욱 공들여 서식의 빈칸을 작성하게 한다.
비단 나만 그렇게 느낄까.
같은 직원끼리든지, 민원인과 공무원 사이든지 차이는 없을 것이다.
다 같은 사람들인데.
공무원 사직서, 공무원 퇴직, 공무원 퇴사, 의원면직 신청서 등등 공무원이 의원면직이란 걸 하게 될 때 어떤 양식의 서류를 제출해야 하는지 열심히 찾아보았다.
당시만 해도 지금의 나처럼 대한민국에 이렇게나 많은 공무원들이 의원면직을 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때였다.
그런데 그 사직서란 게 도대체 어떻게 생긴 걸 말하는 거지?
그것도 새올 서식 표준함에 있는 건가?
법제처에 들어가 봐야 하나?
예전에 얼핏 봤을 때 그런 건 못 본 것 같은데?
아마 그땐 전혀 예상치 못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눈에 띄지도 않았을지 모른다, 설사 있었다 하더라도.
'인사 담당자한테 전화해서 물어볼까?'
뭐가 이쁘다고 상냥하게 알려 주겠어.
나 같아도 귀찮기만 하겠다.
물론 물어보면 대놓고 싫은 티야 내겠냐마는 이미 좀 껄끄러워진 사이라 그건 통과.
남편과 둘이서 여기저기 뒤졌다.
이제 부부는 '반드시 의원면직을 하고 말리라'하는 마음으로 의기투합해 이때만은 '일심동행동'이다.
그러나 그렇게 공을 들여 찾아 헤맸는데도 놀라운 사실은 다들 하나같이 '엄격한 사직서 양식은 없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아니, 이럴 수가.
형식 빼면 시체라고 여겼던 공무원 세계인데 사직서 형식이 없다니 말도 안 돼.
혹시 모르지, 또 내가 못 찾았을 지도.
대개의 글들은 '정확히 이런 서식을 사용해야만 의원면직이 가능하다'는 그런 내용은 절대 없었다.
지방 일행직 의원면직의 경우에 말이다.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니네.
사람들이 많이 애용하는 그런 간단명료한 서식을 찾아서 작성해 보았다.
서식에 맞게 제대로 작성된 민원 신청서가 아니면 반려가 일상인 공무원인데 이 중대하고 크나큰 퇴직을 앞두고 사직서 하나 제대로 작성 못해서 퇴짜 맞고 시간을 끌면 절대 안 되었으므로 나는 한 번에 끝내버리려고 작정했다.
"본인은 OOO상의 이유로 사직코자 사직서를 제출하오니 수리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네이버 검색으로 찾아낸 사직서 내용-
'코자/~코저' 저런 말 볼 때마다 왜 저런 말을 쓰는지 이해가 도통 안 됐지만, 나는 당시까지 공무원 신분이었으므로 대대로 내려오는 아름다운 문화유산은 그대로 받아들인다. 전승의 의무가 있다.
뭐야? 이렇게 간단해도 되는 거야?
누구나 작성할 수 있는 글이잖아.
그렇다.
그렇게 특별할 것은 없었다.
평범한 게 진리일 때가 많다.
바보처럼 왜 그렇게 머리를 싸맸더란 말인가.
사직 이유를 어떻게 작성해야 하나, 사실대로 고백해야 하나, 난 굳이 자세한 건 알리고 싶지 않은데 무슨 말을 써넣을지 한참이나 고민했다.
남편이 거들었다.
"일신상의 사유!"
"뭐? 너무 성의 없는 거 아냐? 다들 개인 사정으로 그만두는 건데, 더 구체적으로 적어야 하는 거 아냐?"
"쓸데없이 뭘 자세히 적어? 그냥 그렇게 쓰면 되겠는데."
"그래도 될까? 그래도 사직서인데."
그만두는 마당에 나는 육하원칙이라도 따지려고 했단 말인가.
이젠 좀 벗어나자.
그럴 필요가 있어.
언제까지고 그렇게 살 작정인 게야?
"사직서가 뭐 별거야? 나 그만두겠다. 그거면 됐지."
"맞는 말이긴 한데. 그래도 좀 뭔가 부족한 거 같은데."
"요건만 간단히 쓰면 되지. 꼭 필요한 것만 넣고."
"그런가? 한 번 해 본 사람이라 역시 다르네. 전과자다워."
남편의 재능기부 시간이다.
"아무튼 이게 제일 간단하고 필요한 말은 다 들어가 있으니까 이게 좋겠다."
"솔직히 다들 사정이 있어서 그만두는 거지, 그것도 다 개인 사정 때문에. 그런데 그 말을 곧이곧대로 적으라고?"
"안 그러면? 개인 사정이지, 뭐 남의 사정 때문에 그만두는 건 아니잖아."
묘하게 설득된다.
전과자의 거침없는 추진력, 달리 보인다.
남편 말이 맞다. 나 혼자만 내용을 가지고 끙끙 앓았다.
"걸핏하면 '일신상의 사유로', '개인 사정으로' 이렇게 많이 쓰잖아."
"그러네. 그럼 그렇게 하면 되겠다."
2022년 1월 11일 화요일 오전 10 시경의 일이었다.
그날 나는 몸이 많이 안 좋아 하루 병가를 내고 집에서 요양 중이었다.
남편이 박차를 가했다.
"이왕 그만두는 거 빨리 정리해 버려."
"그래. 마음먹었을 때 얼른 해야겠다."
엊그제까지 이미 마음이 떠났다는 여자 친구를 죽어도 못 보내겠다며 필사적으로 매달려 연민에 호소하는 남자 친구처럼 퇴직 결사반대를 외치던 사람이 맞나 싶게 의외로 적극적이었다.
그래, 나쁜 사람은 아니야.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정말 필요한 정보만을 담아서 족집게 강의를 전과자 남편의 단기 속성반에서 받고, 너무 무성의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여백의 미가 가득한 사직서를 드디어 다 작성했다.
'이런 식으로 사직서를 내면 될까' 해서 인사담당자에게 먼저 문자를 보내 봤다.
시치미 떼고 입 밖으로 말을 내뱉지 않고도 연락을 할 수 있는 수단이 있다는 게 새삼 고마웠다.
입에서 나오는 언어는 그 당시 굳이 필요하지 않았으니까, 손가락만 부지런히 움직이면 되었다.
내용 같은 건 크게 상관이 없는 건지 그에게서 바로 답장이 왔다.
그러면서 이어 원본을 보내달란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오늘 안에 진도를 빼야겠다 싶어 당장 출력해서 남편을 대동하고 집에서 30분도 더 걸리는 그곳까지 갔다.
올해 1월 1일부터 육아휴직을 하고 있는 남편이 그날따라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었다.
난 그때 도저히 손수 운전할 수 없는 상태였으므로, 한 시라도 마무리를 빨리 짓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으므로.
눈보라가 매섭게 휘몰아치는 칼날의 겨울 아침이었다.
내 마음도 이미 '3한4한'의 겨울날이었고, 시베리아 한복판에 홀로 서 있었다.
하늘마저도 나의 간절함에 몸부림치는 건가.
오늘내일하는 환자 같은 얼굴로(남편의 주관적인 의견) 인사담당자를 만났다.
설마 이렇게 빨리 가져오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지 당황한 눈치였다.
아닌 건 빨리 결단을 내려야 했다.
"다른 업무로도 많이 바쁘시겠지만 최대한 빨리 처리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진심으로, 한 시간에 한 번씩 예약 문자라도 보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내 중대한 일이 그에게서 잊히지 않도록.
저 한 마디만 남기고 뒤돌아섰다.
그는 봉투를 열어 내용을 슬쩍 보더니 검토해 보고 연락을 주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조회할 것도 있고, 요청하면 한 달 정도 걸릴 수도 있어요. 여기서 하는 게 아니라 다른 기관에서 다시 자료를 받아야 하니까 그 정도는 걸려요. 아무리 빨리 처리해 주고 싶어도 혼자 하는 게 아니니까."
라며 내게 절망적인 말들만 했다.
아니, 이럴 수가.
한 달이라니!
그래서는 안된다.
안다. 혼자만 처리할 사항이 아니라는 거.
그래도 그가 나처럼 좀 재촉을 해주었으면 좋겠다.
물론 나만의 소망이다.
그는 내가 아니다.
이런, 점점 욕심을 부리고 있구나 내가.
여기까지 온 것만도 어딘데.
내가 그동안 줄기차게 알아본 바로는, 신원 조회 같은 걸 한다고 했다. 혹시 사고 친 건 없나 확인도 한다고 했다. 예를 들어 횡령을 했다거나 하는 것 말이다.
누구는 2주도 안 돼서, 누구는 정말 한 달이 다 돼서 처리가 됐다고 하는데 그걸 읽는 내게도 그 분노가 느껴질 정도였다.
나는' 채 2주도 되기 전에' 일을 마무리 지었다는 그런 사람들의 사례가 곧 내 사례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했었다. 그런데 한 달씩이나 걸릴 수도 있다는 말을 듣자 잠시 멍해졌다.
설마 내가 미워서 최대한 시간 끌려고 그러는 걸까?
나랑 무슨 원수 사이라도 된다고, 설마 그러겠어?
너무 바쁘니까 내 사직서 같은 건 신경도 안 쓰는 거 아냐?
그래도 내가 전달은 했으니까 진행이야 하겠지.
직원 한 명 그만두는 거 대수롭지도 않을 테고, 당장 급한 일이 있으면 내 일이 밀려 날 텐데.
이를 어째?
지금도 무지 바빠 보이는데 저러다가 내 일은 다 잊어버리고 깜빡해 버리면 어쩌지?
달랑 종이 한 장짜리 어디 흘려도 모르고 지나가겠다.
10,800 번뇌의 시작이다.
무언가에 간절히 매달리게 된 경험이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 옛날 공무원 합격도 이렇게 간절하진 않았다.
내가 너무 예민하게 반응했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그랬을 테지.
숨을 고를 필요가 있었다.
내가 이 눈 속을 헤치고 무슨 마음으로 거기까지 갔는데 그렇게 가혹하게 대하시나요?
잠시 야속하기까지 했다.
어디까지나 나 혼자 북 치고 장구치고 한 거다.
담당자 입장에선 대수로울 게 없었을 거다.
내가 간절하다고 해서 상대방도 간절해야 한다고 강요하는 건 일종의 폭력이지.
지금 당장이라도 면직 처리를 해줬으면 하는 건 ' 그건 니 생각이고', 그의 입장에선 그럴 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람이란 게 간사하게도 자기 입장만 세상 제일로 중요한 동물이라서 나는 느긋해질 수가 없었다.
내가 일을 그만두고 싶은 건 어디까지나 나의 희망사항이고, 그는 절차에 따라 그 일을 진행하면 그뿐이다.
나에게 무슨 유감이 있다고 내 오해처럼 말도 안 되는 그런 행동을 하겠는가.
내가 일거리를 하나 더 만들긴 했지, 그것도 좀 유쾌하지 않은 일을.
"어떡해. 한 달 정도 걸린다는데?"
"뭐가 한 달씩이나 걸려? 그렇게 오래 안 걸릴 텐데?"
"인사 담당자가 그러던데?"
"그거야 최대한 길게 잡아서 그런 거겠지. 빨리 처리해 준다고 하고 늦게 되면 서로 좀 그러니까."
저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라.
역시 전과자는 뭐가 달라도 다르단 말씀이야.
선구자여,
오늘날 이렇게 내게 족집게 개인 과외를 하기 위한 역사적 사명을 띠고 당신은 11년 전 의원면직 했구랴.
그렇지 참.
주민등록증 재발급 신청도 빨리 나온다고 생각 없이 말했다가 말한 그날까지 안 나오면 그 비난을 감당할 수가 없으니까 날짜를 넉넉잡아 알려주는 것처럼, 똑같은 이치네.
여유 있게 잡았다가 당겨져서 일이 해결되면 기쁘고 고마운 마음까지 들지만, 다짜고짜 금방 된다고 해놓고 그 약속을 못 지키면 실망을 넘어 분노가 뒤따르는 건 자명한 이치니까.
"정말 그럴까? 근데 진짜 그렇게 오래 걸리면 어떡하지? 당장 이 몸으론 일도 못할 상황인데."
"일단은 신청은 했고, 상대방은 수리했고, 처리할 의무가 생겼으니까 진행 안 하지는 않을 거야. 그렇게 업무처리 태만히 하는 공무원 없어 요즘. 너무 걱정하지 마."
아니, 남의 편에게서 저런 든든한 말을 다 들어보네.
의원면직도 하고 볼 일이구나.
나의 기쁨, 나의 고통, 당신이 이런 사람인 줄 몰랐었어.
남편의 말이 다소 위안을 주기는 했지만 그래도 좀 걱정되는 건 사실이었다.
사무실에도 그만두겠다고 얘기했으니까 최대한 빨리 빠지고 눈앞에서 안 보여야 서로 편할 거라고 생각했다.
한 달이나 기다려야 한다면 내게는 끔찍한 고문밖에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자꾸 바쁜 사람한테 매일 전화해서 닦달할 수도 없는 노릇인데 어쩌면 좋지?
자꾸 귀찮게 하면 내 일을 진행시키다가도 '일시정지' 버튼을 눌러 버릴지도 몰라.
남편은 자꾸 걱정하는 내게 이미 사직서까지 낸 마당에 뭘 그리 걱정하냐며 핀잔을 주었다.
내가 잠시 모든 면에서 지쳐 있던 틈을 타 오래간만에 내게 호기까지 다 부려본다.
아무리 책을 많이 보고 강의를 많이 듣고 훈련을 해 왔어도, 그 당시만큼은 마음의 여유를 부릴 수가 없었다.
사람 사는 일이 어디 책대로, 배운 대로만 되던가 뭐.
그날 밤 나는 다 작성한 사직서를 인사담당자에게 전달하는데 봉투를 열어보니 글자 하나 없이 하얀 백지인 꿈을 꾸었다.
그래도 일은 진행되어 가고 있는 중이었고, 시간도 흘러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