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퇴직을 고민하고 있는 줄 몰랐다.
세상 물정 모르던 내가, 진작에 일을 치르기 전에 봤더라면 더 좋았을 그런 정보들이 널려있다.
그동안 나만 모르고 있었던 거야.
알아야 면장을 하지.
이래서 나는 면장을 못하는 거다.
최종적으로 내 의원면직에 마침표를 찍어 줄 사람은 인사담당자였다.
물론 팀 내의 팀장님과 과장님도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그 두 분께는 내 확고한 의지를 피력하는 게 관건이었고, 인사담당자가 이런 내 결정을 얼른 받아주고 최대한 빨리 면직 처리로 이어주는 게 가장 중요했다.
그 누가 어떤 말로 달래고 위협한다 해도 절대로 마음을 바꿀 생각은 없었다.
팀 내에선 어느 정도 수긍하는 분위기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련을 못 버리는 듯한 느낌은 약간 받았다.
내가 특출 나게 뛰어난 인재여서가 절대 아니란 것쯤은 나도 잘 안다.
연초라 누가 어느 부서에서 일을 하든, 게다가 대규모로 전체 인사발령이 있은지 고작 일주일이 지났기 때문에 중요하지 않은 일이 없었고, 안 바쁜 사람이 없었다.
업무에 치어서 바빠 죽겠는 사람은 있어도, 할 일 없이 한가해서 따분해 죽는 사람은 구경도 못하는 게 연초이고 인사이동 직후이다.
세상 사람들아, 그건 다 오해라네.
공무원이 하는 일이 뭐가 있냐고 쉽게 말하지 마소.
하는 일 엄청나다네.
바야흐로 4차 산업혁명 시대, 더 바빠진 사람들이 공무원이라네.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잘 모를 테지만, 공무원 치고 한가한 사람 나는 못 보았소.
워라밸이 다 웬 말이오.
그런 거 우린 모르오.
아마도 War-label'이 맞는 말일 것이오.
단지 내가 꼭 필요해서라기보다는 당장 한 명 빠져 버리면 업무에 차질이 생길 것이므로 일단은 나를 말리고 보는 일, 그건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거기서 약해져서는 안 된다.
이렇게 결정하기까지 얼마나 우여곡절이 많았던가.
그나저나 인사담당자는 얼굴 한 번 본 적도 없는 사람인데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까.
오만가지 생각들로 머릿속은 뒤죽박죽이었고, 오전에 팀 내 분위기를 순식간에 장례식장으로 바꾸어 놓은 장본인으로서 마음이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장례식장도 이보다는 더 침울할 수 없으리.
"메일 잘 받았습니다. 언제 시간 되면 한 번 얘기 좀 했으면 좋겠는데요. 언제 가능하실까요?"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바로 대답했다.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
그렇게 당장 봇물을 터버리지 않으면 왠지 흐지부지되어 버릴 것 같은 마음에 냅다 대답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차로 5분 거리도 안 되는 곳으로 찾아가는 그 길에 나는 네 번째 출산의 고통을 다시 겪어야 했다.
일단 만나러 가겠다고는 했는데 이렇게 일사천리로 인사담당자가 휘리릭 일을 진행을 시켜 줄 줄이야.
나 당장 내일부터 나오지 말라면 어쩌지?
아직 다 정리 못한 것도 있는데.(애초에 정리하고 말 것도 없긴 했다.)
그 부분에 대해선 생각도 못 했다.
당장 면담을 청하리라고는 말이다.
서류상으로만 사직서를 제출하면 되겠지 했는데 왜 만나자고 하는 거지?
나중에서야 짐작했지만 아침에 팀장님이나 과장님 두 분 중 한 분이 바로 군청에 들러서 인사담당자를 만나고 오신 모양이었다.
원래 그런 식으로 진행을 하는 건가?
물론 전혀 상관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내 일이니까 나는 내가 직접 인사담당자에게 연락을 해서 알려야 하는 줄로만 생각했다.
그래도 미리 언질을 주었던 게 사실이라면 나야 부담이 덜 하다.
그렇게라도 좋게 생각하자.
하지만 어떤 식으로 그날 아침 나의 만행에 대해서 얘기를 꺼내고 어떤 내용의 말들을 전했는지는 내가 정확히 알 수 없으니 그게 좀 걸리긴 한다.
남의 일에 대해 아무리 잘 알고 잘 들었다고 하더라도 당사자가 아닌 이상 듣는 상대방이 그에 대해 곡해할 수 있는 부분이 충분히 있을 수 있고, 당사자인 나를 직접 대면하기 전에 되려 편견을 가지게 될 수도 있다.
그런데 컴퓨터 돌아가는 소리만 들리는 숨 막히는 그곳까지 가서 어떻게 면담을 하겠다는 건지 걱정이다. 게다가 경사스러운 일로 찾아가는 것도 아니고 난감했다.
그런데 인사담당자는 친절히도 그동안 근무하면서 한 번도 가보지 못하고, 그런 곳이 있는 줄도 몰랐던 그런 곳으로 나를 호출했다.
도착했다고 그의 사무실 번호로 바로 전화를 걸었다.
제발 인사담당자가 받아라. 제발.
딴사람이 받으면 뭐라고 하면서 바꿔 달라 하지?
아니, 혹시 사무실이라도 비우고 자리에 없으면 어떡한담?
이게 뭐야?
엉뚱한 걱정들만 한 짐이다.
소심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만나기로 한 곳에 도착을 하니 몇 년 전에 같이 일했던 주사님이 계신다.
아, 그곳에서도 근무하는 직원이 있구나.
처음 알았네.
가뜩이나 신경 쓰고 살 일도 많은 세상, 내가 오만가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어야 할 필요는 없으니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감당할 수 있는 범위에서만 살아야지.
그 안에서라도 잘 살아내면 그걸로 족하다.
그래도 아는 얼굴이 있다고 바짝 긴장했던 마음이 조금은 느슨해진다.
그분은 어땠을지 몰라도 정말 몇 년 만에 보는 얼굴이라 반갑기도 했다.
이미 나에 대한 소문이 나서 다 알고 있는 건가?
평소 그 분답게 않게 좀 가라앉은 분위기다.
어차피 나중에 의원면직 인사발령 공문이 뜨면 다 알게 될 텐데 며칠 먼저 안다고 큰일 날 거야 없지만 확실히 일이 결정된 다음에 직원들이 알게 되는 것과 중간에 어떤 식으로 왜곡돼서 전달될지 모르는 그런 상황이 연출된다면 그것은 전혀 유쾌하지 않다.
말 많고 탈도 많은 곳이 그 세계다.
다시 예/아니오 게임을 시작해 본다.
지금 그곳 직원들과 내가 한 집에서 살 것인가?-> 아니오.
그들과 내가 평생을 연결고리 걸어가며 왕래하고 살 사람들인가?-> 아니오.
지금 내가 괜한 걱정을 하고 지레 겁먹을 만큼 내 걱정이 가치 있는가?-> 아니오.
답이 금방 나온다.
아까운 내 시간을 쓸데없는 걱정들로 낭비하지 않아야지.
작정하고 기다리는 님은 더디 오기 마련이다.
드디어,
문이 열리네요,
인사담당자가 들어오죠,
첫눈에 난 내 구세주가 될 사람이란 걸 알았죠.
형식적이고도 아무 의미도 없을 법한 인사말이 오가고.
"엊그제 복직하셨는데요."
유난히 그 말을 강조한다. 나만의 착각일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팀에서 그걸 강조하며 얘기를 건넸을지도 모른다.
"네."
"근데 갑자기 의원면직을 하시겠다고요?"
차라리 직원들에게 전체 메일을 구구절절 써서 띄워버릴 걸 그랬나?
"제가 그럴만한 개인적인 사정이 있어서요."
"그동안 육아휴직이 길어서 적응하는 데 처음에 좀 힘들 수 있다는 건 아는데."
내가 언제 누구에게라도 힘들어서 그만두겠다고 하기라도 했나?
"그런 거랑은 전혀 상관없는데요."
"일을 좀 더 해 보시고 시간을 좀 가져 보시는 게 어떨까요?"
"적응을 못해서가 아니에요."
"일을 쉬다가 하면 누구나 다 처음에 힘드니까."
"일이 힘든 거면 차라리 덧 낫죠. 그리고 일 때문에 힘들다면 말씀하신 대로 익숙해지면 점점 나아질 거고. 그런데 지금 제 상황이 좀 안 좋아서 이렇게 결정했습니다."
쉽게 결로 안 날 것 같은 분위기다.
예상 못 했다.
나는,
내가,
"의원면직하겠습니다."
그러면,
인사담당자는
"네. 알겠습니다. 어서 안녕히 가시지요."
하고 바로 끝내버릴 줄 알았다.
배후에 누군가 있는 것 같다.
아마도 최대한 설득을 해 보라고 미션을 받았는지도 모르지.
내가 너무 안일하게 생각하고 너무 일찍 면담을 와 버린 걸까.
그는 나를 최대한 설득하기 위해 급히 호출했고, 나는 최대한 빨리 끝장을 보려고 곧장 달려간 셈이다.
"혹시 몸이 많이 안 좋으신가요? 어디 멀리 병원 다니세요? 대한? 민국?"
인사담당자는 구체적인 지역을 거론하며 자꾸 나에게서 뭔가 알아내려고 하는 느낌을 받았다.
팀에 말씀드릴 때도 구체적인 사유는 언급을 안 했으므로 궁금하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도대체 그 이유가 뭔지 그것 좀 알아내 보라고 당부받고 온 건지도 모르지.
"그런 것까지 다 말해야 하나요?"
지금 아쉬운 게 누군데 이렇게 세게 나가버리는 거야?
이러면 곤란해.
확실히 마무리 지을 때까지는 난 약자야.
본색을 드러내기엔 아직 일러.
그는 갑이고 난 을이야, 어디까지나.
어떻게든 그에게 일을 빨리 마무리 짓게 해 달라고 사정을 해도 모자랄 판인데 감히 어디서 말대꾸란 말인가.
하지만 이미 뱉어버린 말이다.
맞는 말이긴 하지.
내 신상에 대해 시시콜콜 다 이렇다 저렇다 떠벌릴 수는 없는 일이고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고 본다.
그래서 그렇게 반응한 거다.
유감이 있어서 그런 건 절대 아니다.
혹시라도 2만 5천 년 후에라도 이 글을 보게 되는 날이 온다면 그때의 행동을 가볍게 무시해 주길 바란다.
그리고 말이란 건 으레 건너 건너 퍼지면 이상하게 부풀려지고, 엉뚱하게 결론이 나기도 하는 법이니까 오해할 만한 말은 삼가자.
"어쨌든 지금은 계속 일할 수 있는 상황이 전혀 못돼서 그런 거니까 좀 이해해 주시고, 최대한 빨리 처리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급하게 결정할 것이 아니라, 병가나 질병 휴직을 좀 써보고 결정하는 건 어떠세요?"
또 나왔다.
이 정도면 국민 병가, 국민 질병휴직이라 해도 손색이 없겠다.
"저도 그런 게 있다는 거 왜 모르겠어요? 생각 안 해본 것도 아니고요. 충분히 다 생각해 보고 신중하게 결정 내린 겁니다. 하루 이틀 만에 충동적으로 결정한 거 절대 아닙니다. 가정까지 있는 사람인데 저도."
아니 가정까지 꾸리고 사는 사람이 자식도 둘이나 있는 사람이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가 싶은 표정을 그의 얼굴에서 언뜻 봤다고 느낀 건 순전히 내 기분 탓이겠지.
이미 마음을 다 굳혔는데 왜 이렇게 이야기가 길어지는가.
출장이라도 내고 왔어야 했나.
진짜 이런 상황은 예상 못 했던 건데.
달리 면담을 하자고 부른 게 아니었구나.
다 계획이 있었던 거야.
인사담당자라고 아니 황당할까.
"지금 그렇잖아도 자리가 많이 비어서 인원 보충해 달라는 데도 많은데."
지금 그 상황에서 그가 나한테 할 소리는 아닌 것 같다.
안 들은 걸로 치면 된다.
다른 사람들 사정까지 신경 써 줄 여유가 없다니까요.
충분히 이해하고, 안다.
날마다 듣던 소리가 사람이 없네 사람이 없네 이 소리뿐이다.
해년마다 그렇게도 많이 뽑더니 왜 자꾸 사람이 없다는 건지.
자세한 내막은 모르겠지만 거기까진 내 소관이 아니니까 더는 궁금해하지 않기로 하자.
2009년 처음에 임용될 땐 일행직을 달랑 나 한 명만 뽑더니 요즘은 그래도 10 단위로 뽑기도 하는 것 같던데 뽑아서 다 어디로 보내버린 거지?
그때랑 비교하면 지금은 그나마 나은 거 아닐까.
하긴 하도 휴직자가 많다고 하니......
아니지 아니지.
동요되어선 안돼.
난 내 목적을 달성해야만 해.
사람은 어차피 다 자기 위주이기 마련이다.
나도, 인사담당자도, 팀장님도, 과장님도.
그러니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진심으로.
나로 인해 피해를 봤다고 느꼈을 모든 이들에게.
"지금 남편도 육아휴직 중인데 오죽하면 제가 지금 복직하자마자 그만두겠다고 하겠어요. 그만큼 제 상황이 안 좋아요. 좀 이해해 주세요."
같은 말만 서로 되풀이하고 침묵이 이어지고 또 같은 소리 하고.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면 많이 온 셈이다.
좀 더 기운을 내야지.
"어떻게 정 안될까요? 정말 그만두실 거예요? 그래도 힘들게 들어왔을 텐데"
굳이 그런 말 안 해도 뉴스란 걸 보고 사는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다 알지.
공무원 별것 아닌 것 같아도, 실제로 그 세계로 들어가 보면 진짜 딱히 별것은 없는데도 의외로 밖의 사람들은 '별것'있는 건 줄 (일부는) 단단히 착각하고들 있는 것 같다.
"네. 물론 쉽게 합격한 건 아니죠. 그런데도 그만두겠다는 거잖아요."
마흔셋, 지방직, 일반행정, 7급, 공무원, 그동안 근무한 세월보다는 앞으로 근무할 세월이 훨씬 더 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에 와서 어찌 보면 정말 한창 일할 나이에 공무원 퇴직을 해버리겠다고 하면 어떤 사람들은 이상하게 볼 수도 있겠지.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될 수 있겠지.
하지만 남의 상식 같은 건, 그것까지 신경 써야 할 의무가 내겐 없다.
확고하고도 간절한 내 마음을 전하는 게 우선이다.
"네, 그럼 일단 알겠습니다."
뭐야, 갑자기 이렇게 마무리되면 어떡해?
뭔가 그다음 단계를 제시해 줘야 하는 거 아냐?
의원면직을 하려면 어떻게 어떻게 해라 이런 거 말이다.
내가 몰라도 한참이나 몰랐었다.
언제 의원면직이란 걸 해 봤어야지.
태어나고 처음 시도해 보는 의원면직 아닌가.
아차차.
전과자 남편이 있었지 참.
그런데 남편은 그 당시에 혼자 다 결정하고 통보하고 바로 사직서 쓰고 나왔다고 했는데?
그에게선 아무것도 벤치마킹할 게 없다.
나의 기쁨, 나의 고통.
나는 그에게 확실히 못된 것만 배웠노라.
인사담당자만 만나면 바로 뿅~ 하고 내 일을 처리해 줄 줄 알았더니만, 할 말은 서로 다 했는데 이제 어쩐다?
순진하게도 나는
'이건 이렇게 하고, 저건 저렇게 하면 언제까지 처리하겠다'
이런 내용의 확답을 받을 수 있을 거라 기대했었다.
그런데 면담 내내 나를 설득하려고만 하는 그런 느낌만 받았지 내가 얼마나 의원면직을 바라고 있는지 그다지 크게 신경 쓰고 있는 것 같지가 않다.
절차상 필요하니까 면담도 하는 것 같았다.
이렇게 끝내 버리면 곤란한데?
계획에 차질이 생긴다, 그것도 아주 크게.
자리에서 일어서는 인사담당자를 붙잡았다.
이대로는 죽어도 그냥 못 보내겠어요.
무정한 당신.
야속하셔라.
님아, 날 두고 그냥 가면 아니 되십니다.
오늘 처음 본 사이지만 아쉬운 사람은 당장 나니까, 하는 데까지는 해 보자.
"주사님, 하루라도 빨리 처리됐으면 좋겠어요."
거의 애원조였다.
"알겠습니다."
형식적인 답변만이 돌아왔다.
아니야, 저건 전혀 알겠다는 사람의 표정이 아니야.
아!
인사담당자만 만나고 나면 끝일 줄 알았는데 말이지.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간 이 기분은 뭘까.
도대체 모르겠어.
모르니까 면장을 못하는 거야, 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