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을 달이는 시간

엄마를 이해하기 위하여

by 글임자
23. 3. 30. 장, 장

<사진 임자 = 글임자 >


"애들 학교 보내놓고 와서 나 좀 도와줘라."

"집에 무슨 일 있수?"

"장을 달여야 쓰겄는디."

"다리 아프다면서 무슨 일을 하려고 그러셔 또?"

"아파도 해야제. 내가 안하믄 누가 하냐? 일 다 해놓고 병원 가야제."


어차피 아빠와 나는 엄마의 지휘 아래 보조적인 역할만 잘 수행하면 될 터이므로,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어떻게 하는지는 잘 모르지만 일단 시키는 대로 단순노동만 하면 될 것이었다.

가뜩이나 다리도 아프다면서 웬 장을 다 달이겠다고 그러시는 건지, 아프다 아프다 하면서도 일을 놓지 못하고 일에 파묻혀 지내시는 모습을 보면 가끔 엄마가 엄살을 부리는 게 아닐까(결코 그럴 분도 아니고 그럴 리도 없겠지만) 강하게 의심이 들곤 했다.


"촌에 살면서 일 안 하고 살 수 있다냐. 일은 아파도 해야 쓰는 것이여."

"아프다면서 왜 해? 일하고 아프느니 일 안 하고 안 아프겠네 나는."

"그래도 그게 그것이 아니여."

"엄마, 아프면 아픈 사람만 서럽다니까? 누가 알아주기나 하는 줄 아셔?"

"어째 안 알아준대? 아들이 알아주고 딸이 알아 주제!"

"아무도 안 알아줘. 그러니까 더 아프고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적당히 하시라니까."

나는 무시무시한 말을 해 버렸다.

그 적당히란 게, 세상 가장 어렵고도 힘든데, 그 '정도'에 대해 감히 내가 말했다.

뭐든 적당하면 좋다는 걸 누가 몰라서 그러나.

평범하기가 가장 어렵고도 힘든 것처럼 일이란 것도 적당히 몸 상하지 않을 정도로만 하는 게 매우 어려운 일임과 동시에 말처럼 쉬운 것도 아니란 것쯤은 나도 잘 알고 있다. 알고 있으면서도 가끔 일에 치여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보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하긴 세상 모든 일이 '이해'라는 말로 다 받아들여지는 것도 아니란 걸 알지만 말이다.

게다가, 딸인 나는 직접 와서 도우면서도 알아주고 싶은 마음이 없는데, 장 달이는 구경도 못한 세 아들들이 무슨 재주로 그 공을 알아주겠냐고, 그건 엄마 혼자만의 착각일 뿐이라고, 나중에 안 알아준다고 서운해하지도 말라는 말은 차마 할 수가 없었다.


"엄마, 이 정도면 몇 년은 먹겠는데?"

"올해가 제일 많이 하기는 했제."

"조금씩만 하지 뭐 하러 이렇게 많이 해 힘들게?"

"이까짓 거 얼마나 된다냐. 여기저기 나눠주고 하믄 얼마 남지도 안 해."

"누구 줄 생각하지 말고 그냥 엄마랑 아빠만 드실 거 조금씩만 하라니까."

"그것이 그라고 된다냐?"

나는 단 한 방울도 가져다 먹지 않는데 도대체 다 어디로 흘러 들어가는 거냐고 진실을 파헤치지는 않았다 물론.

비록 나는 안 가져다 먹지만(일종의 자발적 미수령이라고나 할까?) 여기저기 어딘가로 보시하게 될 그것을 위해 엄마는 듣기 싫다는 잔소리를 해가며 시키는 대로 일했다.


"집간장을 써야제. 사서 먹으믄 쓴다냐!"

언젠가 시중에 판매 중인 간장을 사다가(그 공산품을 전달한 브로커는 물론 나였다.) 요리하는 장면이 발각됐을 때 아빠는 말씀하셨다.

"이것도 다 쓸 데가 있어. 요리에 따라서 다 다른 것이제. 알지도 못함서 잔소리 좀 그만 하슈."

엄마가 자못 세게 나가셨다.

아빠는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를 넘어서 그보다 한 차원 높은 단계인 '우리 집 것만 좋은 것이여'를 그 누구보다도 맹신하는 분이다.

엄마 말마따나 정말 한 가지 재료로 요리를 할 때도 어떤 방식으로 무슨 음식을 만들 것인지에 따라 장도 다르게 써야 할 필요가 있다.

요리는 엄마가 하시는 것이니까 아빠도 잠자코 보고만 계시면 좋겠는데 가끔 원치 않게 은밀한 조리 현장을 들키면 저렇게 한 소리씩 듣게 되는 것이다.

부부가 10년을 같이 사나 40년을 넘게 같이 사나 다들 비슷하구나, 어떤 공통점만을 뜻하지 않게 새삼 발견하곤 한다.


나야 그 장맛이라는 것도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솔직히 맛이 어떻게 다르고 특별히 더 맛나다는 느낌도 없지만(엄마 미안해요.) 부모님은 '그래도 집에서 맛든 것이 좋다.'는 생각이 강한 분들이라 내가 어찌해 볼 도리가 없다.

"엄마, 근데 엿은 왜 넣는 거야?"

"그것이 있으믄 장이 안 상해. 그것이 방부제여."

"무슨 엿이 방부제야?"

"그런다고 하믄 그런 줄 알 것이제. 잔소리 그만하고 너는 시킨 일이나 해라."

정말 과학적인 근거가 있는 말인지는 모르겠으나 평생을 그렇게 해 오시고, 또 그렇다고 하시니 그런가 보다 할밖에.


대학교 다닐 때 할머니랑 같이 고추장을 쑤어 본 적이 있었고, 메주를 같이 만들었던 적은 있었다.

한동안 손을 놓았다가 최근에야 다시 조금씩 부모님이 하시는 걸 거들고 있다.

장물을 가마솥에 부어서 달이고 엿을 넣은 항아리에 붓고 그대로 두면 된단다.

황토물 같은 그것이 시간이 지나면 시커면 장으로 변한다고 한다.

단순노동이었지만 시간이 걸리고 인내심이 필요한 일이었다.

그리고 약간의 수고로움은 필수다.


"병원에 갈 때 가더라도 나 할 일은 해 놓고 가야제."

"몸이 아픈데 장은 무슨 장! 그냥 신경 쓰지 말라니까."

최근 갑자기 관절염이 심해져서 거동하기가 힘들어진 엄마는 최대한 빨리 병원에 가자고 하시면서도 '그전에 일부터 끝내고 가야 한다'며 서두르셨다.

간장, 그게 뭐 그리 대수라고, 당장 당신 몸이 아픈데 그게 눈에 들어오기나 할까?

이럴 땐 정말 나는 엄마를 이해하기 힘들다.

이해가 안 되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이해하기를 포기해 버렸는지도 모른다.

엄마와 나는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들 같기도 하다.

어찌 됐건 아픈 와중에도 꼬박 하루치의 품을 들여 엄마는 기어코 장 달이는 일을 무사히 마치셨다.

이제는 기다리는 일, 그것이면 된다.

아마도 짜디짜겠지, 엄마의 징그럽고도 고된 세월만큼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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