꿩과 까치와 산비둘기를 경계하며
부녀의 땅콩 심는 주말
2023. 4. 8. 한 알도 소중해< 사진 임자 = 글임자 >
"한 구덩이에 두 개씩 심으믄 쓰겄다."
"땅콩이 얼마 안 되는데 안 모자랄까?"
"일단 두 개씩 심어 봐라."
"모자랄 것 같은데..."
지난 토요일, 오후의 나른한 볕은 전형적인 봄날의 그것이었고 바람은 더 이상 쌀쌀하지 않았다. 그 말인즉, 바야흐로 땅콩을 심을 시기가 됐다는 것이다.
"엄마, 땅콩은 언제 심어? 올해는 나랑 애들이랑 같이 심을게."
"심기는 심어야 쓰겄는디."
"아빠 혼자 하려면 힘드니까 내가 가서 심을게. 나 혼자 심어도 금방 심겠네. 아무튼 연락 주시구랴."
거의 모든 농사일에 있어서, 물론 내가 전업 농업인이 아니기도 했거니와 아는 것도 별로 없고, 농사짓는 솜씨 또한 별 볼일 없는 관계로 부모님이 거의 모든 일에 주가 되고 나는 살짝 옆에서 거드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땅콩 심는 일만은 달랐다.
마늘 심는 일이나 쪽파 심는 일과 비슷하게 세상 단순하고도 쉬워서 유치원생이라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우리 집 마흔한 살짜리도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면 말 다했다.
한마디로 그만큼 쉽다는 것이다.
호미로 구덩이 파서 심으면 끝이었다.
그런 일에는 (물론 난생처음 해본 사람에게는 그마저도 난색을 표할 일이겠지마는 서당 개 3년이면 풍월을 읊고 농부의 딸 40년은 어지간한 호미질에는 도가 텄다.) 자신 있다.
무슨 농사든 무턱대고 심어놓기만 한다고 해서 끝이 아니라 사후 관리가 더 중요하고도 어려운 법인데 나는 경솔하고도 어리석게 쉽게도 말한다.
이미 2주 전에 아빠가 밭을 고르게 다 다듬어 널찍하게 이랑도 만들어 두셨다.
"올해는 비닐을 씌워 볼끄나?"
"작년에는 안 씌우고 했는데? 그냥 심지 뭐 하러 비닐을 씌운다고?"
"비닐을 씌워야 풀이 덜 나제!"
아하, 그런 깊은 뜻이!
가능하면 제초제를 안 하고 농사를 짓고 계셔서 '그놈의 풀'을 원수 보듯 하시는 분들이 우리 부모님이다.
거의 매일 밭에 쭈그리고 앉아 풀을 뽑고 계신다.
풀에게 죄가 있다면 단지 생명력이 끈질기다는 것, 그뿐이다.
풀 뽑는 일에 물론 간간이 나도 합세한다.
자주 가서 하는 일이 아니므로 나는 그저 재미있다.
(우리 엄마가 들으시면 속없는 소리 한다고 한 말씀하실 게 뻔하지만 전업이 아니라서 그런가 막중한 책임감도 어떤 의무감도 내겐 없다. 이런 몹쓸 자세는 농사일에 전혀 도움이 안 될 것이다.)
"땅콩이 모자라겄다. 하나씩 심어야 쓰겄냐?"
"이걸로는 반도 못 심겠네. 하나씩 심는 게 낫겠수."
"일단은 두 개씩 심어 보자."
"그럼 3분의 1도 못 심을 것 같은데, 많이 모자랄 것 같은데..."
아직 이랑의 반을 가려면 한참이나 멀었다.
70 평생 농사를 지은 분답지 않게 그날따라 아빠는 확신이 없었다.
이상하다, 농사 하루 이틀 지은 분도 아니고, 작년에 그 자리 그대로 땅콩을 심었었는데 그렇게 가늠이 안되시나?
땅콩을 심은지는 5년도 훌쩍 넘은 지 오래다.
"안 되겄다. 이제 하나씩만 심자."
딸에게 선전포고라도 하듯 마침내 아빠는 중대한 결정을 내리셨다.
"작년에는 몇 개씩 심었는데?"
"하나씩 심었제."
"그럼 하나씩만 심어도 되겠구만. 하나씩 심읍시다."
어디까지나 속세의 인간의 입장에 보자면 얄미운 비둘기나 까치가 그 소중한 한 알을 쏙쏙 빼먹지만 않는다면(여기에 또 꿩이 빠지면 섭하지, 꿩 너도 추가한다.) 하나만 심는다고 해서 크게 문제 될 건 없었다.콩 한쪽도 나눠먹는다지만 땅콩 한 알은 아직 나눠먹을 때가 아니다..
"나머지는 케일 심으믄 되제."
급기야 특단의 조치가 내려졌다.
겨우 이랑의 반까지 갈랑 말랑했다.
빈자리가 너무 많은걸?
하지만 심을 땅이 없지 심을 씨앗이 없는 것은 아니니까 내가 걱정할 일도 아니고 아쉬워할 일도 아니다.
케일 말고도 오이고추, 토마토, 가지, 오이, 기타 등등 그 자리를 채울 것들은 넘치고 넘쳐날 테니까 말이다.
심고 또 심고,
요즘 친정은 '무엇이든 심어 보세요'다.
갑자기 날씨가 쌀쌀해지고 봄이 온 게 맞나 싶게 요상스러운 날씨가 이어지고는 있지만 그래도 봄 아닌가?
봄에는 자고로 심어야지.
농사에 베테랑인 친정 아빠와 함께한 토요일, 뭔가 어설픈 딸은 따가워지는 햇살에 자외선 차단제도 바르지 않고 덤빈 과보로 혹시 기미라도 생기는 건 아닐까 조마조마해하며 땅콩을 심었다.
한 알, 두 알 심는 것만으로도 구수한 주말이다.
이만하면 나도 모범 경작생에 버금가지 않을까?
아니, 나이롱 경작생에 더 가까우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