쑥이 멧돼지를 이겼다.

멧돼지는 일단 만나고 나서 생각할래.

by 글임자
2023. 4. 8. 무당벌레 카메오 출현

< 사진 임자 = 글임자 >


"합격아, 엄마랑 같이 쑥 캐러 갈래?"

"어디로?"

"외할머니 집에."

"꼭 가야 돼?"

"가서 치즈(최근 부화한 병아리)도 보자."

"그래!"


나는 쑥에 집착을 하고 딸은 병아리에 집착을 했다.

어쨌거나 두 사람 다 각자 원하는 걸 얻으면 그만 아닌가.

엄마 좋고 딸 좋고, 쑥도 캐고 병아리도 보고.


겨우내 이 봄이 오기만을 기다려왔단 말이다.

해가 바뀌고 계절이 바뀐다고 해서 내게 무슨 특별히 좋은 일이 일어날 리도 없었지만(또 모르지 일어날 지도) 그저 온갖 새싹들이 움 틀 날만 고대해왔던 것이다.

시골에서 나고 자라서 그런지(물론 시골 출신이라고 해서 다들 그런 것 같지도 않긴 하다. 예를 들어 우리집에 사는 성인 남성이 그러하다.) 유독 계절의 변화에 민감하고 어떤 계절이 되면 뭔가를 확인하고 체험해 보고 싶어 하는 경향이 강한 사람이 바로 나다.

봄은 왔는데, 벌써 4월인데 혹시 늦지나 않았으려나?

"엄마, 지금 쑥 캐러 가면 너무 늦었을까?"

"지금은 뻣뻣해졌제. 벌써 4월인디."

"그래? 그래도 한 번 캐봐야겠네."

나도 나름 요령은 있었다.

지난주에 비가 연속 이틀 내렸고 그 사이에 쑥이 쑥쑥 올라왔을 테니까 엄마 말씀대로 좀 뻣뻣하더라도 중간 윗부분을 자르면 그나마 연한 쑥을 캘 수 있을 거라는 근거 없는 믿음이 있었다.

쑥의 연하고 뻣뻣함의 정도는 전혀 문제가 아니었다. 그냥 쑥을 캐는 그 행위 자체가 나는 즐거우니까.


내가 사는 곳 길가에도 진작부터 쑥 천지였다.

도로 가에서 시커먼 봉지를 하나씩 들고 어르신들이 뭔가를 캐내고 있는 것을 보고 슬슬 시동이 걸린 것이다.

그렇잖아도 해마다 이맘때 친정에 가서 쑥을 캐 오곤 했는데 최근에는 엄마가 편찮으셔서 다른 일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어르신, 그거 먹기에는 안전하지 않아요! 그런 거 드시면 안 된대요. 뉴스 못 보셨어요?"

라고 주제넘게 나서지는 못했다 물론.

도로변에서 매연에 잔뜩 찌든 그 쑥들을 캐서 어디에 쓰시려고 저러시나.

그분들을 보며 전에 읽었던 기사를 떠올렸다.

절대로, 절대로 도로변에 있는 봄나물들을 채취하지 마시라는, 사람이 먹기엔 부적절하다는 그 기사 말이다.

시골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들은 무분별하게 여기저기 제초제를 비롯한 농약을 살포하기 때문에 시골에서 캐온 나물이라도 안심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남몰래 산속으로 들어갔다.

간단히 내 목적지를 엄마에게만 알렸다. 혹시 모를 불의의 사고에 대비해서다.


오래전에는 부모님이 일 년 내내 쉼 없이 밭을 일구던 때가 있었다.

우리 밭은 다소 산 중에 있는 편이었다. 생각해 보면 대개가 그랬다.

이젠 부모님도 연로하시고 농사도 많이 줄이신 편이라 집에서 멀리 떨어진 산속에 자리 잡은 밭은 거의 10년 넘게 텅 비어있다.

아니, 황폐해지기까지 한 밭도 있고, 워낙 발길이 닿지 않아 어떤 밭은 이제 찾아갈 수도 없을 지경이 됐다.

농사를 짓는 대신 엄나무를 잔뜩 심어둔 밭이 하나 있다.

"합격아, 엄마랑 같이 산으로 쑥 캐러 가자."

"난 안 갈래."

인적이 드문 곳이라 딸이라도 대동하고 나서려고 했더니만 무정한 딸은 단칼에 거절했다.

혼자 가면 무서운데, 호랑이는 나오지 않겠지만 여전히 멧돼지가 간간이 출몰하는 지역이다.

사람이 가장 무서운 세상이라지만(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아직 멧돼지를 직접 만나지 않은 사람일 것이다.) 사람 못지않게, 귀신 못지않게 물불 안가리고 덤비는 저돌적인 그것도 꽤나 무섭다.

일단 말이 안 통한다.

아직도 옛날에 갑자기 맞닥뜨렸던 때를 생각하면...

사람이나 짐승이나 말이 안 통하면, 그걸로 말 다 했다.

방법이 없다.


산새 소리만 고요한 하늘에 울려 퍼지고 산벚꽃이 와르르 봄바람에 쏟아지는데 병원 수술복만큼이나 선명한 초록색 그 쑥이 여기저기 풍성하게 자라난 걸 보자 반가운 마음만 들고 멧돼지는 순식간에 안중에도 없어졌다.

사람이 이렇게 순식간에 간사해진다.

쑥을 캘 욕심에 멧돼지 생각은 접어두고 일단 만나면 그때 생각해 보기로 하자.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긴급 전화를 바로 할 수 있을 만한 곳으로 자꾸 자리를 옮겨가며 통화 가능 지역을 연신 찾아다녔다.


손수 씨 뿌리고 가꾸지는 않았지만 내가 다 뿌듯했다.

누가 때맞춰 물 주는 사람 하나 없고 일 년 내내 안부 물어주는 이 하나 없지만 저 어린 것은 때맞춰 또 자라났구나.

기특하기도 하지.

대견하기도 하지.

이래서 내가 봄만되면 근질근질해지는 거야.

새파란 네가 보고 싶어서.

쑥국 그거 한그릇 먹어도 그만 안먹어도 그만이지만 너를 보지 않고는 이 계절을 보낼 수가 없어서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