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는 오해했고, 어제는 확실한 물증을 잡았다.

무화과나무 아래의 참극

by 글임자
2023. 4. 27. 허브는 흔적도 없어지고 무화과 잎만...

<사진 임자 = 글임자 >


"아빠! 여기 왜 이래? 무슨 모래가 이렇게 많아? 여기다 내가 허브 심어 놨다니까!"

저번엔 순전히 풀과 허브도 분간 못하는 나의 오해로 애먼 아빠를 의심했지만, 이번엔 물증이 확실하다.

분명히 지난번에 친정에 갔을 때까지만 해도 무화과나무 밑은 맨땅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심은 3종 허브 세트의 보금자리 말이다. 그런데 어제 친정에 갔다가 나는 경악하고 말았다. 웬 모래가 잔뜩 쌓여 있는 게 아닌가.

아빠는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아빠가 마당에 있는 모래 치운다고 하더니만 거기다 다 뿌렸는갑다."

침묵을 지키는 아빠 대신 엄마가 비보를 전해주셨다.

"아니, 내가 거긴 그냥 가만히 놔두라니까 왜 하필이면 거기다가 모래를 뿌렸소?"

거센 나의 항의에 아빠는 침묵만 이어가셨고, 나는 그만 눈물까지 찔끔 날 뻔했다.


내 땅 없는 설움이 이러할까?

비록 손바닥만 하더라도 내가 가진 땅이 있었더라면, 주인인 나 이외에는 어떻게도 처분하지 못하도록 했을 텐데, 애초에 내 땅 아닌 곳에 터를 잡았던 것이 화근이었나 보다.

아빠도 일부러 거기다 모래를 뿌린 건 아니시겠지만 내가 분명히, 신신당부하며 절대 그 구역은 제발 조심해 주십사 간절히 부탁했건만, 깜빡하셨던 것 같다. 뭐라도 한두 개 눈에 띄게 돋아났으면 그걸 보고서라도 멈칫 했겠지만 황량한 그 땅 위엔 '허브'비슷한 거라든지 허브로 오해하기에 충분한 그 어떤 것도 없었다.

자그마치 세 가지나 되는 허브 씨앗을 심었는데, 내가.

이젠 어디에 터전을 잡아야 하나.

새로 허브 씨앗을 구입해야겠지.


아빠가 뿌린 치커리는 벌써 서 너 이파리씩 돋아나고 있던데, 그 옆에 나는 이름도 모르는 그것도 잘만 돋았던데, 굉장히 신경 쓴 흔적이 역력하던데, 비가 안 오면 아빠가 때맞춰 물도 주고 자식 돌보듯 세심하게 관리하시던데...

아빠의 농작물과 나의 허브를 너무 차별하시는 거 아닌가, 이 정도면?

너무 아빠 작품만 편애하시는 건 아닌가?

아빠의 팔은 과연 돋을지 안 돋을지도 모르는 허브보다는 장래가 확실히 촉망되는 농산물 쪽으로 굽었던 것이다.


다시 시작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이름표라도 붙여놔야 할까. 치워버리려고 하다가도 그걸 보면 아차 싶으실 테지?

이번엔 신경을 진정시켜 편두통을 해소해 준다는 '바질'도 추가해야지.

속절없이 무화과나무 이파리만 싱싱하다.

올가을 무화과를 따 먹을 때마다 나는 허브 3종 세트의 참극을 떠올리게 될 것 같다.

그러면서도 바란다.

행여라도 저 모래 더미를 뚫고 한두 개라도 허브가 뿌리내리고 돋아나지는 않을까...

단 한 번으로 합격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허브 키우기 '재수생'은 의심도 많고 걱정도 많기만 하다.

그나저나 그때 공벌레들이 잔뜩 있던데 모래에 다 깔려 죽은 건 아닌가 몰라.

무화과나무 아래의 모래더미는 나에게 보단 차라리 그 공벌레들에게 참극이었다.


그나마 아빠가 소홀히 관리하는 그런, 눈에 잘 안 띌 곳으로 물색해 봐야겠다.

그러나,

아빠는 언제나 부지런하시고 모든 일에 열성적이신 분이며, 결정적으로 친정집 마당과 텃밭 그 어느 곳이고 아빠 명의가 아닌 곳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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