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지금 섬에 있습니다.
그 섬에, 저는, 안 가고 싶습니다.
2023. 5. 8. 꽃 필 날이 다 있네요.< 사진 임자 = 글임자 >
남편은 지금 섬에 있습니다.
요양차 갔냐고요?
아니요, 그는 요양을 떠날 만큼 허약한 체질의 사람이 전혀 아닙니다.
대역죄를 짓고 유배를 간 것이냐고 묻고 싶으신가요?
그건 사실과 다르지만, 안타깝게도 그 섬은 대한민국 영토 안에 있다는 사실을 밝히고 싶군요.
그도 아니면 그럼 혹시, 휴가라도 떠난 것인지 궁금하실 테지요?
가당치 않습니다.
그는 엄연히 출장 신청을 내고 업무차 그 섬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원하지 않았지만 갈 수밖에 없는 일을 맡았거든요.
남편은 지금 섬에 있습니다.
"강풍라도 미친 듯이 불어서 배가 안 떴으면 좋겠네."
그는 말했지요.
어디까지나 그 사람 혼자만의 간절한 바람입니다.
그러나, 나 또한 간절히 바랐습니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제발 월요일 아침 파도가 잠잠해지고 지루한 비도 그쳐 말끔히 갠 하늘을 볼 수 있도록, 당초의 스케줄대로 남편이 무사히 그 섬으로 떠날 수 있기를 비나이다.'
천지신명과 하나님과 부처님께 빌고 또 빌었죠.
혹시 남편과의 사이가 소원해져서 그를 이역만리로 보내버리고 싶은 게 아니냐고요?
에구머니, 망측해라.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만 전혀 그렇지 않다고도 장담할 수 없는 제 입장이 조금 난처해지는군요.
남편은 지금 섬에 있습니다.
요 며칠 장맛비처럼 쏟아지는 폭우에, 재난안전문자가 수시로 쏟아지는 통에 만에 하나 배가 안 뜨면 어쩌나 저 혼자 남몰래 노심초사했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군요.
떠날 날이 다가올수록 남편은 우울해졌고 제 얼굴엔 화색이 돌았습니다.
왜 그렇게 남편을 섬으로 보내지 못해 안달이냐고요?
어디까지나 직장인으로서 그가 할 일에 차질이 생겨서는 안 된다는 노파심에 자꾸 걱정이 되어서 말이죠.
그럼 혹시, 만에 하나 남편이 없는 며칠 동안 불량주부의 본능이 되살아나 집에서 자유로움을 만끽하고픈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는 것은 아니냐고 추궁하신다면, 저는 또 선뜻 대답하기가 망설여지는군요.
단언컨대 양심을 걸고 그런 마음 추호도 없노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는 아내의 마음을 조금은 헤아려 주시기를 바랍니다.
올해로 결혼 12년째, 서로 데면데면해진 지 오래, 며칠 안 본다고 해서 상사병 나서 죽을 일은 없답니다.
오히려 종종 이런 횡재가 잦아질수록 서로의 건강 증진에 적극 이바지하는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남편은 지금 섬에 있습니다.
날씨가 계속 화창하군요.
제가 너무 욕심을 부렸나 봅니다.
별 일이 없으면 집으로 돌아오는 배는 기어코 뜰 예정이라고 합니다.
햇살이 이렇게나 좋은데 그 말을 들은 직후부터 제 마음이 급 울적해지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혹시라도 만에 하나 남편이 하루라도 더 섬에 머물다 오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냐고요?
아, 저는 그저 그가 섬에서의 여유로움을 하루 이틀 정도 더 만끽하고 와도 좋을 듯싶어 그런 것뿐입니다. 일상으로 돌아오면 다시 정신없어지는 바쁜 직장인에게 그 정도의 느슨함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는 1분 1초라도 빨리 섬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니 이런 아이러니가 또 있을까요?
십여 년 전 첫 발령을 받은 곳이 섬이었고, 그때 그가 느낀 고립감은 지금도 치를 떨게 하곤 한답니다.
도대체 그 섬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사실 남편은 '결혼 후 일주일 만에' 국가직 공무원을 그만둔 전과가 있습니다. 그 후 10개월 정도 다시 공시생이 되었고 공부하느라 우리에겐 딱히 신혼생활이랄 것도 없었습니다. 덕분에 저는 '신부 가장'이 되어 남편 뒷바라지란 것도 다해보았네요. 물론 저는 친정에는 전혀 아무 말하지 않았고, 시가에는 그저 휴직했다고 남편이 거짓말을 했답니다. 시가에 가서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며 남편은 제게 주의를 단단히 주었더랬죠.
우연히 그 무지막지한 사실을 알게 된 저의 직장 동료들은 갓결혼해서 뭐 하는 짓이냐며 근심스러움을 가장한 오지랖을 한껏 떨었지만 '옥바라지'도 아닌데 그깟 뒷바라지가 무어 그리 대수라고요?
그리고 그 해 겨울 교육행정직 시험 필기 합격자 명단을 민원실에서 근무하던 제가 입수를 하게 되었죠. 오해는 마십시오, 어디까지나 공문상 요청에 의한 것으로 사사로운 감정은 전혀 없이 공적으로 일만 했을 뿐이고 그저 붙임문서에 있던 합격자 명단에서 주소지 확인요청 공문에 따라 저는 회신을 했을 뿐입니다. 그저 남편 이름과 같은 이름이 있었던 것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그곳은 공공기관이 몰려 있는 곳이었고 운명처럼 그 교육청에서 제 근무지로 공문을 발송한 것입니다. 서로 가까운 위치에 있었으니까요.
이듬해 1월에 남편이 머나먼 섬으로 첫 발령을 받아 제 평생소원인 주말 부부 생활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전 첫째를, 종종 출현해 주는 합격이를 임신 중이었고(남편의 합격을 바라며 제가 지은 태명입니다.), 남편은 주말만 되면 꼬박꼬박 집으로 왔습니다.
아련해지는군요. 생각해 보면 그때가 참 좋았습니다. 제 인생의 황금기라고나 할까요?
전생에 무슨 복을 많이 지었길래 주말부부로 살 수 있었던 걸까요?
내 생에 그런 천금 같은 기회가, 돈 주고도 못 살 횡재가 다시 찾아올 날이 있을까요?
과연 얼마를 지불하면 살 수 있을까요?
남편은 지금 섬에 있습니다.
아이들은 한동안 아빠를 못 본다며 굉장히 서운해합니다. 그리고 보고 싶어서 어떡하냐는 말까지 다 하네요. 아니, 이 애들이! 그러다가 아빠가 중간에 섬에서 탈출해 집에라도 오면 어쩌려고 이러는 걸까요? 정말이지 아무리 철이 없기로소니 참 대책 없는 아이들이죠.
그 뒷감당을 할 자신이 저는 없습니다.
내 자식들이지만 좀 이기적이란 생각까지 드는군요.
그러나 정작 아내인 저는 아무리 수십 번을 연습해도 못 봐서 보고 싶을 거라는 그런 말이 입에서 안 떨어지는데 어쩌면 좋을까요. 하긴, 억지로 연습해서 겨우 내뱉어도 남편의 의심만 살 것입니다.
남편은 지금 섬에 있습니다.
"강풍이라도 불어서 배가 안 떴으면 좋겠네."
섬으로 가기 하루 전날 남편이 했던 말을 살포시 붙여 넣기 해 봅니다
물론 잘 압니다. 금요일 오후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는 그 섬에서 빠져나올 테지요. 만에 하나 계획이 틀어져 하루라도 더 섬에 머물게 된다면 그는 아마도 절망하고 말 것입니다.
헤엄이라도 쳐서 기어코 그 섬에서 탈출하고야 말 사람입니다.
섬이란 곳은, 남편에게는 그다지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지 않은가 봅니다.
내게는 아름답고 낭만적으로만 보이는 곳인데 말입니다.
가끔 동경해 마지않는 그곳이 어쩌다가 그 지경이 되었을까요?
남편은 지금 섬에 있습니다.
"아직도 사람들이 나를 총각으로 봐."
라며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그 발언을, 공갈 내지는 사기에 더 가까운 그 해괴망측한 소리를 종종 제게 하는 남편이랍니다. 정말 그의 말마따나 그 섬에서 그를 총각으로 오해라도 해서 보쌈이라도 해 가주시기만 한다면, 저는 그저 운명이라 생각하고 담담히 받아들이겠습니다. 과감히 보내주렵니다. 남편이 머무는 숙소라도 넌지시 알려 드리면 될까요? 물론 그 은혜 각골난망이라며 죽어서도 세세생생 잊지 않으리라는 각서도 써 줄 의향이 있습니다. 자고로 배은망덕한 사람이 되어선 안 되는 법이니까요.
이참에 그의 말이 사실인지 정말 확인해 보고 싶긴 하군요.
그러나, 그런 오해를 할 만큼 외모가 전혀 총각(남편의 말은 그러니까, 총각은 곧 미혼 남성을 뜻합니다.)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저를 절망의 구렁텅이에 몰아넣습니다.
남편은 지금 섬에 있습니다.
... 그런데, 그 섬에 좀 더 머물면 안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