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딸, 그 선택의 갈림길에서
의미 없지만 대단한 의미를 지닌 대결
2023. 5. 23 < 사진 임자 = 글임자 >
* 세기의 (의미 없는) 대결- 어느 토요일 이야기
"아빠가 바쁜가 보네. 대꾸가 없네."
"아빠한테 지금 전화해도 돼?"
"아니, 아빠 일하는 중이니까 방해하면 안 돼. 일에 집중해야 돼."
"지금 오고 있을 수도 있잖아."
"운전 중이면 더 위험할 수도 있지. 전화받으려다가 말이야."
"그럼 문자는 보내도 돼?"
"응. 그럼 문자를 보내 차라리. 나중에 아빠가 확인해 보겠지."
"그럼 문자 보내야겠다."
"아빠가 진짜 바쁜가 보다. 대꾸가 없어. 엄마가 아까 3시간 전에 보냈는데."
"지금도 안 읽었어? 확인해 봐."
"안 읽었을 걸?"
"엄마, 그럼 대결하자. 나도 아빠한테 문자 보낼 테니까 아빠가 누구한테 먼저 답장하는지 말이야."
"그런 걸 꼭 해야 돼?"
"한 번 해 보자 엄마. 자신 없어?"
"엄마가 왜 자신이 없어?!(=귀신같이 눈치 하난 빠르구나.)"
"근데 왜 그래?"
"누구한테 먼저 답장하는지가 뭐가 그리 중요해?(=만에 하나 너한테 먼저 답장을 해버리는 참사가 일어나면 이 엄만 어쩐다니?)"
"아이 참. 한 번 해 보는 거지 뭐."
"(정 그렇게 네 소원이라면, 좀 불길하긴 하지만) 그래라 그럼."
"근데 엄마, 내가 더 불리한 거 아니야?"
"왜?"
"엄마가 먼저 보냈으니까."
"상관없을 거 같은데?"
"아니다. 나중에 온 게 더 위에 표시되니까 괜찮아. 하자."
"그게 무슨 말이야?"
"재난안전문자도 나중에 온 게 위로 표시되잖아. 그러니까 내 문자가 더 위에 있을 거 아냐?"
"그래?"
"엄마, 아까 엄마가 보낸 거 아빠가 읽었는지 얼른 확인해 봐."
"보나 마나 안 읽었을 거야."
"설마?! 확인해 봐."
"거봐, 역시, 안 읽었어."
"그럼 내가 더 불리한 건 아니네. 해 볼만하겠네."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어?"
"응, 하고 싶어. 과연 아빠가 누구한테 먼저 답장을 할까?"
"그런 건 하나도 안 중요해. 엄만 하나도 신경 안 써.(=엄마가 불안해서 그러는 거 절대 아니다.)"
"난 중요해."
"그런 거에 너무 연연하지 마, 합격아."
"엄마, 자신 없어서 그러는 거 아니지?"
"엄만 하나도 신경 안 쓴다니까.(=자꾸 그러니까 내가 불안하잖아.)"
"근데 자꾸 왜 그래? 혹시 나한테 질까 봐 그런 거야?"
"아니라니까.(=얘가 눈치하나는 빠르네.)"
"그럼 기다려 보자. 누구한테 먼저 답장하는지."
"아이고, 그런 건 아무 의미가 없다니까."
"엄마 수상해. 신경 안 쓴다고 하면서 자꾸 왜 그러는 거야?"
"진짜 신경 하나도 안 쓰여!(=너무 티 났나?)"
"근데 아빠가 누가 보낸 걸 먼저 읽을 거 같아 엄마는?"
"글쎄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니까!"
"내 걸 먼저 읽고 답장하겠지?"
"아마, 아빠는 우리가 보낸 거 둘 다 읽어보지도 않을 거야.(=이 엄마가 너희 아빠랑 같이 산 세월이 얼만데? 보나 마나 뻔하다, 얘.)"
"설마?"
"엄마가 확신해. 분명히 안 읽어 볼 거야."
"그러진 않겠지."
"아마 아빠는 집에 와서 볼 걸? 그러면서 '어? 언제 문자 보냈었어?' 이럴걸? 엄마가 장담한다!"
"그래도 설마 그럴까?"
"그럴 거라니까, 분명히!"
(10분 후)
"엄마, 아빠가 읽었어?"
"아니, 안 읽었어. 일하느라 바쁜가 봐."
"그래? "
"아마 안 읽을 거라니까?"
"일단 기다려 보자."
(또 10분 후)
"어? 합격아, 아빠한테 전화가 왔네?"
"안돼! 나한테 와야 되는데."
"늦을 거래."
"그럼 이번엔 엄마가 이긴 거네."
"이기고 진 게 어딨어?"
"아니다. 문자로 답장을 해야 되는데 전화를 했으니까 이긴 건 아니야."
"그런 거야?(=그렇게 생각해서 네 마음이 편하다면야.)"
"당연하지. 문자를 보냈으니까 문자로 답장을 해야 공평하지."
"그렇다고 하자."
"근데, 아빠가 엄마가 보낸 건 읽었어?"
"안 읽었을 걸?"
"확인해 봐."
"안 읽었네. 내가 뭐랬어. 안 읽었을 거라고 했잖아."
"그래? 잠깐! 그러면 진짜 엄마가 이긴 건 아니야. 아예 읽지도 않았으니까."
"그래, 그렇다고 치자!(=얘가 자꾸 왜 그런 데에 집착을 한담?)"
"결국 엄마가 못 이겼네."
"그래. 하지만 전화는 엄마한테 왔네.(=유치하지만 이게 바로 전화받은 자의 여유 아니겠느냐?=넌 문자도 전화도 받지 못했구나.)"
나의 기쁨,
나의 고통,
나의 충실하고도 의리 있는 답장자,
나의 뻔한 예상에서 한치의 어긋남도 없는 사람,
본인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오늘도 우정출현해 주시는 고마운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