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의 일요일 사용법
잘한 건 잘한 일이니까요.
2023. 4. 24. 예쁜 풍경<사진 임자 = 글임자 >
"아빠가 출장 다녀오고 어제도 출근해서 늦게까지 일하고 와서 피곤할 텐데 너희 문제집 채점도 다 해주네. 저런 아빠도 별로 없을 거야."
정말 오랜만에 보는 풍경이었다.
작년까지는 남편이 아이들 문제집을 채점하고 틀린 문제는 설명도 해주곤 했는데 올해는 너무 바쁜 부서로 발령이 나는 바람에 한동안 그 일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지난 일요일 아침부터 일찍 기상하시고 아이들 수학 문제집을 들추며 손수 점검에 나선 것이다.
"얘들아, 이제 아빠 바빠지니까 문제집 채점은 못해줘. 대신 엄마한테 해달라고 해. 아마 당분간 아빠는 시간이 없어서 못해 줄 거야."
라며 의미심장하게 우리 앞에서 선언했었다.
물론 과목은 수학에 한해서만이다.
수학에 약한 자는 잠시 빠졌고, 그 자리에 남편이 나선 것이다.
나는 나머지 과목과 기타 등등을 신경 쓰기로 했었다.
아는 선에서 약간의 도움을 줄 뿐이다.
미리부터 공부에 질리게 하면 안 된다고 되도록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아이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하면서도, 다른 아이들 대부분이 학원을 다니는데 우리 집은 그렇지 않으니 이를 감안하여 (아무리 자유로운 학습 방식도 좋지만 어느 정도 학생 신분으로서 해야 할 학습량이 있는 것이니, 나는 이를 초등생의 최소한의 양심이라 일컫는다.) 수학 문제집 하나만이라도 매일 풀기로 아이들과 약속했었다.
작년까지는 남편이 퇴근을 한 후, 가끔은 주말에 몰아서 수학 과목을 지도해 왔다.
올해 부서를 옮기고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는 것은 물론, 주말도 없이 이틀 중에 하루, 어느 때는 이틀 내내 출근해서 일해야만 하는 상황이 생겼으므로 남편이 미리 선언하지 않았더라도 그동안 고수해 온 방식을 유지하기는 힘들어 보였다.
"일단 지금은 아빠가 너무 바쁘니까 적응하고 좀 나아지면 그때 다시 생각해 보자."
라고 아이들에게 협조를 구했다.
그런데 그날은 많은 면에서 전과는 다른 행보를 보였다.
나 몰래 혼자 좋은 영양제라도 잡수고 계시나?
연이은 출장에, 주말 출근에 피곤할 법도 한데 평소답지 않게 하루 종일 많은 일에 의욕적이었다.
이젠 정말 새 부서에 완전히 적응이 되어 버린 것일까?
오전은 아이들 수학 수업하는 것으로 간단히 마무리하고 오후엔 내 차 내비게이션 업그레이드를 하겠다며 차에서 그것을 떼어 왔다.
"업그레이드 좀 해 놓지. 해 놨으면 걸릴 일 없었을 텐데."
라고 말하는 그는 최근 속도위반 과태료 고지서를 받았다.
올해 두 번째다.그 불통이 내게 튀어 기어이 업그레이드를 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잠깐 와봐. 거치대 좀 봐봐."
내가 사용하던 내비게이션 거치대가 망가진 지 오래였다.
"어차피 난 어디 멀리 갈 일도 없고 내비도 잘 안 쓰는데 없어도 돼."
크게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으므로 진심으로 신경 안 써도 된다고 말했으나,
"업그레이드해서 쓰면 되지. 자기도 저번에 한 번 걸렸잖아. 내비만 잘 작동했어도 안 걸렸을 텐데."
하면서 끝까지 업그레이드의 급박성에 대해 얘기했다.
그러면서 나의 전과 또한 결코 간과하지 않겠다는 듯(말은 안 했지만 본인은 이미 다 알고 있었다는 듯) 얼굴색을 바꾸며 얘기했다.
사람이 의뭉스럽기는...
"후진 주차할 때도 내비 없으면 후방 카메라도 못 보고 불편하지 않아?"
언제나 그는 나를 못 미더워한다.
"안 불편해. 거울로 보면서 천천히 하니까. 그리고 언제까지 후방 카메라만 보고 주차하겠어? 그거 없이도 주차할 수 있어야지!"
나는 제법 큰소리쳤다.
처음엔 후방 카메라를 안 쓰면 절대 주차도 못할 것 같더니 이젠 많이 익숙해졌다.
남편이 거치대를 주문하겠다고 했다.
무언가 사겠다는 의지로 그의 얼굴엔 화색이 돌았다.
30분 정도 지났으려나?
차에 다녀오더니 뭔가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 사람처럼 외쳤다.
"이걸 거치대로 쓰면 되겠네!"
남편에게 차를 인수받은 이래 항상 거기 있어왔던 그것을 거치대로 쓰겠다고 했다.
"이거 원래 거치대로도 쓸 수 있는 거야."
그것은 연락처를 남기는 그 용도로만 쓰는 것인 줄 알았는데 새삼 새로운 용도를 알았다.
"근데 여기 내 연락처 해놨었는데 누가 이렇게 숫자를 다 섞어 놨어?"
뜬금없이 남편이 취조하기 시작했다.
"손대긴 누가 손댔다고 그래?"
"숫자가 막 섞여 있잖아. 자기나 애들이 만졌겠지."
"난 만진 적 없는데? 애들도 만질 일 없고."
"안 만졌으면 이게 왜 이렇게 됐겠어? 만졌으니까 그러지."
"안 만졌다니까! 구신이 손댔나 보지 뭐."
"만져놓고 안 만졌다고 그러네."
"진짜로 난 안 만졌다고!"
어쩐지 무사히 넘어간다 했다 내가.
잘 나가다가 왜 갑자기 숫자에 집착을 하는 거지?
구신이 만진 셈 쳐 그냥!
잠깐 구신 들렸었던 거라고!
내비게이션보다 차 안에 cctv 설치가 더 급해 보였다.
"사이즈가 안 맞으니까 한쪽만 손보면 되겠어."
딱히 마음에 드는 거치대가 없었는지 드디어 그는 결심했다.
"거치대 하나 가지고 몸부림을 하네. 그거 없어도 되는데 그냥 쉬지. 안 피곤 해?"
한참이나 실리콘 재질의 그것을 이리저리 만지고 그럴듯한 거치대를 탄생시켰다.
"고마워. 역시 자기가 최고야! 오랜만에 후진할 때 카메라 보면서 하니까 진짜 좋다."
진심으로 나는 남편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처음에 약간은 멈칫했음은 물론이다.
"아이고, 이럴 때만?"
남편은 감히 나의 진심을 의심했다.
"응, 이럴 때라도!"
직장인에겐 금쪽같은 귀한 일요일 하루를 온전히 가족들에게 다 쏟은 남편이 금빛 휘장에 둘러싸인 듯 그렇게 찬란해 보일 수가 없었다. 일찍이 우리 집 가장이 그처럼 기특하고 믿음직하고 든든해 보인 적도 없었다, 태초에 하늘이 처음 열린 이래로.
팔불출이라고 뭐라 해도 이런 남편은 자랑해야 마땅하다, 고 나만 생각한다.
지나간 다른 날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정말 그날 하루만큼은 자상한 아빠요, 친절한 남편으로서 손색이 없었다.
우리에게 대단히 비싼 선물을 준 것이 아니다.
호화스러운 경험을 하게 해 준 것도 아니다.
하지만 분명 그 이상의 값어치가 있다.
알뜰하게 일요일을 사용한 그 남자, 살뜰하게 가족까지 챙겨주는 그 남자.
나의 기쁨, 나의 고통.
비록 중간에 숫자판 가지고 삐끗했던 게 살짝 거슬리긴 했지만(갑자기 사람이 돌변하면 크나큰 재앙이 닥치는 법이므로 평소대로 일관성을 유지한 것이리라.)그까짓 거 무시할 수 있을 만큼 그가 우리에게 보인 행동은 큰 의미가 있었다.
이런 날도 다 있다.
* 귀하는 평소 같지 않은 언행으로 가족에게 최선을 다하고 타의 모범을 보였으므로 이 기록물을 수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