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온틈 Essay

연희동의 삐걱임

우편함에 생긴 새로운 소명

by ontm

나는, 연립주택 1층의 우편함입니다. 당신은 이미 나를 보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서대문구 연희동, 홍제천 건너편 버스 정류장을 끼고 돌아 골목길을 쭉 따라 걷다 보면 내가 몸 누인 자리가 있습니다. 이곳에 놓인 지 삼십 년은 족히 넘었을 겁니다. 주변 붉은 벽돌은 모서리가 닳아 둥글어졌고, 내 이름표에는 몇 겹의 페인트가 덧칠해져 첫 이름의 흔적조차 희미합니다.


나는 이 자리의 모든 풍경을 기억합니다. 소리 없이 내려앉는 겨울 눈과, 추위가 가시면 가로수에서 틔어 오르는 연둣빛 새순은 아마도 내가 가장 먼저 발견했을 겁니다. 또 30여 년 전, 티 없는 웃음으로 이 빌라에 들어서던 어린아이와, 10여 년 전 한 짐 가득 짊어진 채 붉어진 눈시울로 건물을 올려다보던 젊은이의 뒷모습을 기억합니다.


몇 년 전만 해도, 이곳의 주민들은 나에게 종종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러다 기다리던 편지라도 마주하면, 그 누구보다도 환한 웃음을, 때로는 안도의 눈물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감정을 온전히 나눌 수는 없었지만,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나에게는 커다란 기쁨이었습니다.


하지만 주민들은 더 이상 나를 찾지 않습니다. 물론 세상이 변한 탓이겠지만, 나의 낡음이 그 무관심의 이유인 듯하여 서글펐습니다. 기대감 어린 얼굴로 내게 손을 내밀어 준 것은, 대체 언제가 마지막이었을까요.


그러던 어느 날, 301호에 새로운 이가 이사를 왔습니다. 그는 늘 무언가에 쫓기는 듯 걸음이 빨랐고, 대문 앞에 서서도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지 못했습니다. 그의 얼굴에는, 10여 년 전 그 젊은이의 것과는 다른 종류의 고단함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그를 보며 알았습니다. 당신들에게는 이제 기다릴 편지가 없구나. 아니, 어쩌면 기다릴 틈조차 허락되지 않는구나. 모든 것이 즉각적으로 확인되고, 1초의 여백도 허용되지 않는 당신들의 세계에서, 텅 빈 나를 열어보는 일은 가장 무용한 일이 되어버렸구나.


그래서 나는, 나의 새로운 소명을 정했습니다.


이제 나는, 당신의 걸음이 잠시 멈출 수 있도록, 계절의 첫 순간이 당신의 시선에 가닿을 수 있도록, 일부러 몸을 뒤틀어 작게나마 삐걱대는 소리를 내기로 했습니다. 당신의 단단한 세계에 작은 균열을 내는, 나의 가장 서툰 방식의 초대입니다.


나는 이제 설레는 소식을 기다리는 대신, 당신이 놓치고 있는 세상을 소리 내어 전합니다.


그러니 연희동 어느 골목에서 문득 쇠가 비벼지는 소리가 들려온다면, 잠시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주세요. 어쩌면 당신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계절의 첫 증거, 혹은 이 골목의 새로운 풍경이 펼쳐질, 아주 작은 틈이 열리는 순간일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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