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주기에 즈음하여

어디까지, 언제까지 써야 할까?

by 엘 리브로

아버지의 산소에 다녀온 지 1주일이 지났다.

한 달 후면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1년이 되는 날이다.

아버지를 생각할 때마다 가슴 한 구석이 저려오고 눈물이 차올라 흘러넘치고 목구멍에서 뜨거운 불덩이가 느껴지는 것은 여전하며 지금 이 순간에도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상의 평온함을 이어가며 잘 살아지고 있는 것이 나의 지난 1년이었고 '글쓰기'라는 행위가 가져다준 선물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아버지를 생각하며 써 내려간 글들을 이제는 마무리 지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자주 했지만 쉽지 않다. 아직 할 얘기가 더 있는 것이라고 어느 작가님이 얘기해 주었고 '정말 그런가?' 생각했다가도 다시 ' 아닌 것 같은데...'라며 아버지에 대해 무슨 이야기를 더 해야 할까, 무슨 이야기를 내가 하고 싶은 것일까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 보기도 했다. 그러다 깨달았다, 내가 쓴 글이 아버지의 치부를 드러낸 것 같아서 너무나 죄송하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을. 아버지와 함께 했던 시간들을 기억하고 싶어서, 더 이상 가질 수 없는 그 시간들을 박제해 놓고 싶어서 기록해 간 그 글들이 아버지의 치매로 인한 증상들을 세상에 다 드러내 놓았다는 사실에 죄책감이 들기 시작했다. 누구보다도 자존심이 강했고 늘 타인의 시선을 의식했던 아버지를 '노망 난 노인(아버지의 표현대로 하자면)'으로 적나라하게 묘사한 나의 글들을 아버지가 저 세상에서 내려다보고 있다면 뭐라고 얘기하실까?


떠나버린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매일 울고불고하는 딸을 바라시지는 않으셨을 거라고, 자신이 좀(?) 망가지더라도 딸이 어서 기운 차리고 일상의 소소한 기쁨들을 누리고 살기를 바라셨을 거라고 억지로 믿어본다.


아버지는 평생 힘들어하는 모습이나 근심 어린 얼굴을 보이지 않았는데 그것이 아버지의 고단한 인생을 살아가는 나름의 낙천적인 방식이었거나 아니면 내가 어리석어서 미처 못 읽었을 수도 있다. 어쩌면 둘 다일 수도... 말하자면 나는 아버지를 잘 모른다.

아버지의 참모습을, 아버지의 내면의 생각들과 인생에서 이루고 싶었던 것들이 무엇인지를 나는 모른다.

아버지가 치매에 걸리지 않았다면, 그렇게 일찍 갑작스럽게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알 수 있었을까?


지금 아버지가 온전한 정신으로 살아계신다면 나는 아버지에게 글쓰기를 권했을 것이다.

아버지의 흔적을 찾던 중 아버지의 블로그를 발견한 순간의 기쁨과 아무것도 기록되지 않은 텅 빈 블로그를 확인했을 때의 실망감이 떠오른다. 여행을 좋아하고 산을 좋아했던 아버지, 사진을 좋아하고 음악을 좋아했던 아버지가 쓸 수 있는 글감은 무궁무진했을 터인데...

아버지의 블로그가 개설되어 있다는 것을 진작에(치매 발병 이전에)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도 해 본다. 아버지의 글이 있다면 아버지의 내면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을 텐데...

내가 평생 보아 온 아버지의 모습이 아버지를 규정하는 전체적인 모습일 수 없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닫는다.

아버지의 삶이 나의 삶에 영향을 주었고 대체로 그것은 만족스럽기는커녕 불만과 원망의 원천이었으나 만약 아버지의 상처들과 고뇌를 읽을 수 있었다면 나의 과거의 시간들도 지금 기억하는 것과는 달라졌을 것이다.


아버지는 대체적으로 낙천적으로 보였다. 살면서 아버지와 많은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으나 일상의 대화 속에서 무심히 툭 던지듯 한 말들을 통해 엿볼 수 있었던 것은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의 아버지 나름의 생활철학이었다.

"먹고 죽은 놈이 때깔도 곱다"라던가 "인생 뭐 별 거 있냐?"라는 말들, 당장 그 달의 생활비가 없어도(무심한 자식인 나는 한참 나중에야 알았지만) 당장 차에 기름이 들어있다면 경치 좋은 곳으로 드라이브를 나갔던 아버지, 전셋집에 살고 있었지만 좋은 오디오를 들여놓으며(고모는 그런 아버지를 돈 모을 생각을 안 한다며 철없다고 비난했었다) 아침마다 음악소리에 잠을 깰 수 있게 해 준 아버지, 86 아시안게임을 봐야 한다며 화질 좋은 더 큰 컬러 TV를 할부로 샀던 아버지(그때 나는 얼마나 신이 났던가)...

내가 기억하고 기록할 수 있는 아버지의 그런 모습들이 있었다는 것이 이제야 생각난다.


그런데도 나는 다른 이야기들이 아닌, 치매 증상으로 정상인의 모습에서 상당히 벗어나 있던 시기의 아버지의 일상을 글로 써버렸다. 내 일생 중 아버지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시기였고 아버지를 가장 많이 생각하며 지낸 시기였기에 잊고 싶지 않았다.

내가 어떤 방식으로 아버지에 관한 에피소드를 적는다고 한들 아버지를 온전히 이해했다거나 아버지의 인격에 근접했다고 할 수 있을까? 그저 아버지가 등장하는 나의 이야기일 뿐일 것이다. 나의 주관적인 느낌과 내 눈에 보인 것만을 기억하고 있을 이야기 말이다.


돌아가시기 전에 요양병원에서의 아버지는 다른 환자들처럼 자식들을 기다리거나 집에 가고 싶어 하거나 지나온 인생을 한탄하지도 않았다. 나의 죄책감의 무게나 슬픔의 깊이 따위는 전혀 아버지에게 문제가 될 것이 없어 보였다. 병실에서의 생활에 편안해했고 간식거리만 있으면 만족스러워했고 기다림을 잊어버린 채 늘 똑같은 하루하루를 살고 있었다. 내가 본 아버지의 모습은 그랬다.

아버지가 괜찮다고 하는데도 괜찮지 않을까 봐 전전긍긍하던 못난 딸의 걱정을 덜어주시려고 그렇게 빨리 이 세상을 떠나버리신 것은 아닐까?


아버지의 이야기를, 아니 아버지가 등장하는 나의 이야기를, 나의 이야기인데도 아버지의 자랑하고 싶지 않은 모습이 많이 나오는 이야기를 계속 적어나가야 할지 멈추어야 할지 여전히 모르겠다.


아버지가 꿈에라도 나타나서 "그냥 써라. 내 초상권만 지켜주고!"라고 한마디 툭 던져주신다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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