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누라 김밥이 제일 맛있다고?

마누라는 사 먹는 김밥이 좋다요

by 엘 리브로

김밥을 좋아하는 나와 달리 애들은 김밥을 좋아하지 않는다. 언제부터 안 좋아하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돈 주고는 절대 안 사 먹으려고 한다. 간단히 끼니를 해결하고 싶을 때 가성비 면에서나 영양적인 면에서 김밥만 한 것이 없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지만 아이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햄버거를 더 좋아하는 아이들에게 도대체 비싸면서 고열량에 영양가라고는 없는(양상추라도 많이 들었으면 그나마 용서가 되련만...) 그 퍽퍽한 걸 왜 사 먹느냐며 잔소리를 해 온 나는 언제부터인가 아이들을 위해 김밥을 만들 일이 없어져 버렸다.

중학교 때까지는 학교에서 견학이나 소풍을 갈 때 김밥을 싸주면 잘 가져가던 아이들이 차츰 볶음밥이나 유부초밥을 싸달라고 주문하기 시작했고 도시락 핑계로 김밥 재료를 잔뜩 준비해서 몇 끼니를 김밥으로 해결하며 만족하던 나의 즐거움이 사라진 것이다.

그래도 남편은 김밥을 좋아하니 가끔 김밥을 만들기는 했으나 차츰 귀차니즘에 빠진 나는 파는 김밥을 사다 먹기 시작한 지 몇 년이 되었는데 도무지 맛있는 김밥을 찾기 힘들었다.

사 먹는 김밥은 브랜드를 막론하고 내 입에 맞지 않았다. 두꺼운 생오이가 들어있어서 뻣뻣하고 싱겁거나, 밥이 너무 질척거리거나 너무 고두밥이거나, 간이 짜거나 싱겁거나, 우엉의 간장맛이 너무 강해서 다른 재료의 맛을 못 느낄 정도로 우엉을 잔뜩 집어넣었거나, 당근이 너무 두껍거나 가늘더라도 생당근이어서 뻣뻣하거나 했다. 이런저런 김밥을 한 번씩은 다 사 먹어 보았지만 매번 햄을 빼달라고 주문해야 하고 사실은 단무지도 빼달라고 하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이상하다는 듯한 눈초리를 장착한 "단무지 없이 뭔 맛으로 김밥을 먹느냐"는 말을 들어야 하므로 패스. 대신에 먹으면서 단무지는 다 골라냈다. 온갖 합성물질에 절여진 단무지가 건강에 좋을 리 없다는 생각도 있지만 묘하게 달짝지근한 합성감미료의 맛이 싫어서 내가 김밥을 만들 때는 직접 만든 피클을 넣거나 익은 김치나 묵은지를 넣는다.


결국 맘에 드는 김밥집을 찾지 못하고 다시 만들어서 먹어 왔던 내가 최근 몇 달 전에 제법 입에 맞는 김밥을 발견하고야 말았다. 이사 온 동네에서 가까운 곳에서 우연히 한 번 사 먹게 된 김밥이 내가 만든 것과 거의 같은 레시피를 쓰고 있는 것이 아닌가!

가장 중요한 시금치(난 시금치가 제철이 아닌 계절에는 오이를 사용하는데 소금 간을 한 후 기름에 볶아서 부드럽게 만들어서 사용한다)가 들어있으며 당근 또한 두껍지 않게 적당한 채 썰기를 하고 간해서 볶은 것이 들어가 있다. 달걀과 어묵, 맛살이 들어있고 밥이 질척이지 않고 적당히 고슬고슬하다. 단무지는 들어있지만 햄은 원래 빠져있어서 일부러 빼달라고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사 먹어 본 김밥 중에 가장 내 스타일이라며 유레카를 외치던 나와 달리 남편의 반응은 영 시원찮았다.

"별론데... 당신이 만든 것이 더 맛있어."

"아놔, 맛만 있구먼! 뭐가 다르다고 그래?"

"김치가 들어있는 게 더 좋은데..."

"여기 김치! 따로 집어 드셔!"

남편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김밥을 먹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쩝쩝 소리를 내가며 맛나게 먹었고 지난가을부터 겨울까지 거의 매주 한두 번 꼴로 그 집 김밥을 사다 먹었다. 워낙 좋아하기도 하지만 사실은 낮에 나 혼자 먹는 밥을 번거롭게 뭔가 만들기 싫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긴 했다.

남편이 회사에서 늦게 오는 날이면 저녁에 뭐 먹었냐는 질문에 가끔은 김밥을 사 먹었다고 말하곤 했는데 집에서는 휴일에 김밥을 사다 먹자고 하면 질색을 했다. 질려서 그런가 하고 물으면 "당신이 만들어주는 김밥은 먹고 싶지."라고 말한다.

차라리 딸들처럼 김밥 자체가 싫다고 하면 이해하겠는데 내가 만든 김밥을 고집하는 것에 은근 짜증이 나는 요즈음의 나.


오늘은 토요일. 집안일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놀고 싶은 날이다. 영화나 보고 소설이나 읽으면서 말이다.

그래도 아침에 밥을 차려주고 낮에 프렌치토스트를 만들어 주었으니 저녁엔 김밥을 사다 먹어야지 생각하며 신이 나서 포장주문 전화를 하고 나니 남편이 말한다, "난 김밥 안 먹어!"

"왜? 맛만 있더구먼!"

"당신이 만든 거 아니면 김밥은 안 먹어!"

"나도 쉬고 싶다고! 당신은 먹지 마, 그럼. 김밥이 그렇게 뚝딱 만들어지는 줄 아냐고요!"


혼자서 김밥 두 줄을 게눈 감추듯 먹었다. 한 줄은 좀 아쉽고 두 줄은 많아서 한 줄 반을 먹으면 딱인데...

김밥을 사 오면서 생각했었다, '시금치랑 사다가 따로 만들어 줄까?'라고...

'아니지, 고생 사서 하지 말자. 정신 차리고!'


지난겨울 내가 만든 김밥, 묵은지가 없어서 생김치를 얹어서 먹었다는.

난 요리하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결혼 후 25년 동안 열심히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아니, 건강검진 할 때만 빼고) 아침밥을 차렸고 내가 일을 시작하기 전까지는 15년 동안 외식도 거의 하지 않았지만 음식 만드는 것이 좋아서가 아니라 어쩔 수 없이 한 것이었고 아무도 도와주지 않고 혼자서 요리하는 시간이 하나도 즐겁지 않았다. 코로나와 함께 한 지난 3년 동안은 아침에 밥을 꼭 먹어야 한다는 생각과 습관을 버렸고 외식도 예전에 비하면 자주 하게 되었다. 외식이라고 해서 늘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혼자서 주방에서 몇 시간 동안 고개 숙여가며 음식준비를 하면서 받는 스트레스는 없으니 그걸로 충분하다.


그나저나 영감탱이, 방에 누워서 안 나온다.

휴일이면 밥상 차려놓고 부를 때만 방 밖으로 나오고 밥숟갈 내려놓자마자 방으로 들어가 드러눕는다.

한 줄 남은 김밥은 내일 아침에 내가 먹어야겠다.


라고 쓰는 순간 남편이 방에서 나오는 기척이 들린다.

배고프냐는 나의 질문에 "그러게.. 떡라면 먹을까?"라고 말한다. 그 말은 나에게 라면을 끓이라는 소리...

"아니! 김밥 남은 거 김치에다 드셔!"


내일 아침에 먹을 뻔했던 나의 김밥은 사라졌다.

아까 뭔 생각에 단무지 빼는 걸 잊고 거의 다 먹은 바람에 아직도 속이 느글거린다.


그러고 보니 마누라 김밥이 더 맛난 건 맞다.

배가 불러서 더 못 먹지, 속이 느글거리진 않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