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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 리브로 Jan 11. 2024

골목집 아이들

열두 살의 여름

골목길의 맨 안쪽에 있는 끝집에서 살았던 희진은 골목 입구의 첫 번째 집에 사는 숙이와 친했다.  같은 학년인 희진과 숙은 반이 달랐지만 아침마다 함께 재잘거리며 등교했다. 가까이 살기 때문에 늦은 저녁 시간까지 함께 놀 때도 많았다.

숙은 밝고 명랑했다. 희진은 친한 친구들이나 가족 앞에서는 잘 까불고 말이 많았지만 그 외의 사람들 앞에 서면 긴장해서 말을 잘 못했고  심장이 쿵쿵대서 담임 선생님에게 조차도 먼저 말을 건네지 못하는 쫄보였다. 친구집에 가서도 어른들을 보면 고개만 꾸벅 숙일 뿐 인사말조차도 나오지 않았고 묻는 말에 대답을 하면서도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서 몹시 불편했다.

숙은 달랐다. 동네 어른들에게 생글생글 웃으며 먼저 인사를 하고 어른들과 거침없이 대화를 하는 것을 보면 희진은 그저 신기하고 부러웠다.


어느 여름밤.

그날도 희진은 저녁밥을 먹고 나서 사촌 여동생 영은이를 데리고 골목으로 나갔다. 골목 안에 사는 또 다른 친구 의정이와 숙이도 나왔고 골목 어귀의 가로등 아래에 모두 모여 쭈그리고 앉았다.

낮에 주워 모아서 가지고 놀다가 한쪽 구석치워작은 돌멩이들을 다시 펼쳐놓고서 공깃돌 놀이를 했다.  실핀들을 꺼내어 둘씩 편을 갈라 핀 따먹기를 했고 시끌벅적 수다를 떨기도 했다.

한참 정신없이 떠들고 있던 아이들 앞에 갑자기 교복 차림의  중학생인지 고등학생인지 모를 키 큰 남자가 다가와 서더니 말을 걸어왔다.

"얘들아, 너네 혹시 00 국민학교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

"엉? 거기 우리 학굔데!" 하고 아이들은 이구동성으로 소리쳤다. 희진도 친구들이 옆에 있어서 그런지 자기도 모르게 대답이 나왔다.

그 남학생이 다시 말했다.

"누가 그 학교까지 길 좀 가르쳐줄래? 학교 옆으로 이사한  우리 이모네 집에 볼 일이 있어서 그러는데 처음 가는 길이라서 찾기가 힘들어서..."

아이들은 서로 얼굴만 쳐다봤다. 캄캄한 밤이고 학교까지는 걸어서 20분 이상 걸리는 거리다.

"안 돼요. 너무 늦어서 멀리 갈 수 없어요." 숙이 대답했다.

" 그럼 학교까지는 말고  여기서 조금만 더 큰길 쪽으로 가서 길을 알려주면 좋겠는데... 대신 내가 아이스크림 사줄게."

희진은 아이스크림이라는 말에 순간 혹했지만 낯선 그 남학생을 따라나설 용기는 없었다.

그래도 영은이를 데리고 같이 가볼까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숙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얘들아, 내가 버스정류장까지만 얼른 갔다 올게!"

숙이 교복차림의 남자와 골목밖 어둑한 길로 나가는 것을 잠시 쳐다보던 희진은 '나도 같이 가자고 할걸...' 하는  아쉬움이 남았지만 이내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린 숙을 따라잡기에는 조금 늦은 것 같았다.

의정이가 말했다. "숙이는 좋겠다, 아이스크림도 얻어먹고. 나도 가고 싶었는데 엄마한테 금방 들어간다고 약속했거든." 남은 아이들은  다시 공깃돌 놀이를 시작했다.


한참 노는데 정신이 팔려있는데 의정이네 대문이 열리며 의정이 엄마가 크게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의정아 빨리 안 들어오냐? 지금 몇 신데 아직 그러고 있어?"

후다닥 일어서는 의정이를 보고 희진도 영은이의 손을 잡고  일어나 집으로 향했다.


할머니는 TV 연속극을 틀어놓고 앉아 벽에  기대어 졸다가 아이들의 기척에 번쩍 눈을 뜨며 물으신다.

"언제 들어왔다냐? 연속극이 벌써 끝나고  뉴스 시간이여?"

희진은 그때서야 갑자기 숙이 생각이 나서 숙이가 낯선 남자에게 길을 가르쳐주려고 따라나섰다는 얘기를 했다. 할머니는 깜짝 놀라며 물으셨다.

"뭣이라고? 이 밤중에 어떤 놈을 따라갔다고? 오메, 별일 없는가 모르겠다! 얼른 숙이네  집에 가보자!"

덜컹! 창호지 바른 방문을 열며 마루로 허둥지둥 발을 내딛는 할머니의 다급함에 희진도 긴장하며 허둥거렸다.


숙이네 집은 발칵 뒤집히고 말았다.

숙이 엄마와 아빠, 중학생인 오빠까지 모두 마당으로 나와 희진에게 다그쳤다.

몇 시쯤 갔는지, 어느 방향으로 갔는지... 시간은 알 수가 없었다. 왜 이제야 말하느냐는 질책에 희진은 울음이 터지고야 말았다.

뭔가 큰일이 난 듯 숙이네 가족은 급하게 골목밖으로 뛰어나갔다.

희진은 집에 돌아와서도 한참을 안절부절못하고 숙이 걱정을 했다. 아이스크림을 받아 들고 올 거라고 생각한 숙이가 어딘가로 끌려갔을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가지 말라고 붙잡을 걸 그랬어. 집에 들어오면서 숙이네집에 가서 먼저 말해야 했어...'

숙이 엄마의 표정이 계속 떠올랐다.


"너 때문이야! 너 때문에 우리 숙이가 몹쓸 짓을 당한 거라고!"

꿈속에서 숙이 엄마의 무서운 눈이 노려보았고 희진은 쫓아오는 숙이네 가족을 피해 달음질쳤다.

사람들이 횃불을 들고 들판에서 소리치고 있었다.

"희진아! 희진아!"

숙이는 어디에 있지? 어디로 가버린 걸까? 사람들이 왜 나를 부르지? 나는 모르는데... 숙이가 어디에 있는지 나는 몰라요!

희진이 무서움에 떨며 숨을 곳을 찾아 두리번거리는데 구군가 덥석 어깨에 손을 얹었다.

"아악!"

"아이고 깜짝이야! 얼른 일어나! 학교 가야제! 뭔 땀을 그렇게 흘리고 헛소리를 해대냐?"

"할머니! 숙이는?"

"안 그래도 아까 쓰레기 내놓으러 나갔다가 궁금해서 숙이네 집 앞에 가봤다. 밤늦게 찾았다더라."

"어디서?"

"학교에서 한참 떨어진 데서... 산 쪽으로 끌고 가려는 걸 잡았다는디... 애간장 다 녹았겄지, 숙이 엄마 얼굴이 말이 아니어서 더 물어보지도 못했어야. 그만하길 얼마나 다행이냐?"

희진은 넝마위가 애들을 잡아간다는 외진 들판길이 떠올랐다. 지난밤 꿈에 본 그 길이었다. 버스가 드문드문 다니는 도로가를 벗어나면 들판과 공터가 있었고, 주변에 나뒹구는 쓰레기를 기다란 집게로 집어 등에 멘 커다란 망태에 던져 넣으면서 어슬렁거리는 아저씨들이 간혹 보이던  길. 광주시의 끝자락에 있는 동네에서도 더 멀리 떨어져 있는 그 길을 따라 계속 가면 화순으로 이어진다고 했다.


그날 아침 희진은 숙이네집 대문을 지나치면서 숙이를 부르지 않았다.

며칠 동안 숙이도 희진을 찾지 않았다. 학교 복도에서 마주쳤을 때도 둘은 어색하게 서로의 눈을 피했다.


그리고 얼마 후 숙이네는 이사를 갔다.

친구들은 숙이가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몰랐고 그 밤의 일을 얘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치 없었던 일처럼...

희진은 어딘가에 구겨 넣은 그 기억을 다시 꺼내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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