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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 리브로 Aug 01. 2024

재회

그 여자 김미선 14

초겨울이 되자 한옥집 마당의 풍경은 을씨년스러웠다. 화단의 나무들은 비쩍 마른 나뭇가지에서 누렇거나 짙은 갈색의 잎들이 흔들리다 떨어졌고 마당엔 낙엽이 여기저기 굴러다녔다. 바람에 대문이 흔들리며 삐거덕 소리를 내기도 했다.

마당 한쪽의 나무판자로 만든 개집의 입구는 누렁이 메리가 물어뜯어 너덜거렸고 쇠줄에 묶인 누렁이의 털은 덥수룩했다.

희진은 추워진 날씨만큼이나 마음도 시린 것 같고 왠지 울고 싶어지곤 했다.

미선의 전화가 뜸해지고 더는 놀러 오라는 말도 듣지 않게 되었다.


희원의 두 번째 편지에는 호텔에서 아빠를 만났던 날에 대한 이야기가 적혀 있었고 또 보고 싶다는 희원의 간절한 바람 또박또박 눌러쓴 글자 속에 묻어났다.

희진은 TV 드라마에서나 봤던 호텔에서 희원이 엄마, 아빠와 함께 잤다는 말에 묘한 슬픔과 소외감을 느끼며 단란한 가족의 모습 안에서 혼자만 떨어져 외톨이가 된 것 같았다.

그런데 자꾸 미선이 생각나는 걸까?


"아빠가 네 동생이랑 엄마 만났다고 말 안 하던?"

"아니요..."

"그래? 집에 안 들어온 날이 있었어. 편지도 서랍 속에 있는 걸 봤는데..."

두 번째 편지가  오고 며칠 후 미선이 전화기 너머로 우울한 목소리로 말했었다.


희원에게서  번째 편지가 왔다. 수신자는 언제나 아빠였지만 희진은 능숙한 솜씨로 조심스레 봉투를 열었다. 이번엔 사진이 한 장 들어있었는데 엄마와 희원이 온통 하얀 눈이 소복이 쌓인  나무들 사이에서 환하게 웃고 있었다.

희진이 지난겨울에 손뜨개로 만들어준 핑크색 귀덮개희원은 앞니가 빠진 입을 크게 벌리고 귀여운 표정을 지었다.

한 손을 희원의 어깨에 올리고 다른 손을 카메라를 향해 흔들고 있는 엄마도 콧등에 주름을 지으며 웃고 있었는데 두 사람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희원은 겨울방학을 하면 아빠를 만나러 오겠다고 했다.

"아빠도 보고 싶고 언니도 많이 많이 보고 싶어요." 


새 해가 되고 며칠이 지난 어느 , 짙은 베이지색의 모직 롱코트를 입고 뾰족구두를 신은 엄마가 빨간색 코트를 입은 희원과 함께 집에 왔다.

1년도 채 되지 않은 기간이었지만 안 본 사이에 희원은 많이 자라 있었다.  마당 안으로 들어서며 환하게 웃으면서 "언니~~"하고 큰 소리로 희원을 불렀다. 함께 살 땐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친근한 말투와 밝은 표정에 당황한 희진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어색하게 "어어... 왔어?"라고 말하며 엄마의 표정을 살폈다.

엄마도 역시 처음 보는 화사한 웃음을 머금고 인사를 건넸다.

"잘 지냈지? 많이 컸구나!"


엄마는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눴고 희원은 희진에게 학교 생활과 외사촌 오빠들에 대한 이야기를 재잘거렸다.

"어제 기차 타고 왔어. 아빠랑 그랜드호텔에서 잤는데 얼마나 좋은지 알아? 언니도 그랜드호텔에 가봤어?"

희진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언니, 우리 곧 여기로 다시 이사 온다?"

"뭐? 언제?"

"개학하기 전에 온대. 나도 언니랑 같은 학교로 전학할 거야."

"으응... 그래?"

엄마는 집을 나서며 웃는 얼굴로 희진에게 말했다.

"곧 다시 만나자. 방학 잘 보내고 할머니 말씀 잘 들어라."


꿈속에서 미선은 울고 있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고 전화기를 타고 나지막한 흐느낌이 들려왔다.


퇴근길에 들른 아빠와 할머니의 대화 중에 미선이 유산했다는 얘기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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