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개월이 지났다.
흰둥이가 사라져 버린 후 녀석의 빈자리를 매일 눈으로 훑고 지나가게 되던 그 길을 여전히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나를 보고 흥분해서 껑충거리며 엉덩이를 흔들어대던 녀석의 모습이 눈에 선해서 늘 마음이 아팠다.
처음 두세 달 정도는 매번 지나갈 때마다 눈물이 났지만 그러지 말자고 마음속으로 스스로에게 말을 걸었다.
그것이 삶이라고, 죽었다 한들 어쩌겠는가, 사람이건 동물이건 누구나 언젠가는 죽는 것을... 그런 생각이 내 마음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해 줄리는 만무하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고선 견딜 수가 없었다.
사실 더 괴로운 것은 어디선가 흰둥이가 고통을 받고 있으면 어쩌나 하는 것이었다. 뼈가 드러나도록 다친 발을 하고서 어디서 헤매고 있는가, 누군가로부터 해코지를 당하고 있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내가 그런 상상을 한다는 것이 (어딘가에 살아있다 하더라도) 흰둥이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도 수없이 반복했다.
차라리 고통스럽게 살기보다는 저 세상에서 편히 쉬고 있는 게 나을듯했다. 눈비를 어디서 피하고 있는가, 영하의 날씨에 어디에서 몸을 누이고 있는가, 거리의 쓰레기봉투를 뒤져서라도 뭔가를 먹을 수는 있을까 등등 걱정은 끝없이 이어졌지만 그 생각에 그림자처럼 드러 붙는 감정을 끊으려고 애썼다.
혹시나 주변에서 마주칠까 하여 차의 속도를 줄이고 길가에 정차된 차들 사이를 살피며 오가던 도로에서는 멀리서 흰색 비닐이 나풀거리기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시에서 운영하는 동물보호소의 홈페이지를 매일 들여다보기도 했다. 구조된 수많은 가엾은 개들의 처참한 몰골을 보기도 하고 갓 태어난 새끼들이 구조되었다가 폐사하는 것을 보기도 했다. 공격성으로 인해 혹은 회복불능의 부상으로 인해 안락사당하는 개들도 있었다.
사진으로만 봐도 그들이 느끼는 공포가 전해져 왔다.
매일 들어오는 새로운 개체들로 인해 사진 목록의 페이지들이 몇 개씩 넘어가 있으면 이전에 봤던 페이지가 나올 때까지 뒤쪽으로 넘겨가며 확인했다.
어느 순간부터는 너무나 마음이 아파서 자세히 읽지 않으려 했고 흰둥이와 닮은 개들만 집중적으로 보게 되었다.
그러다가 겨울이 오면서부터는 보호소 홈페이지를 방문하는 횟수를 의식적으로 줄였는데 내 마음의 평온을 위해서였다.
흰둥이를 들여다볼 때마다 함께 챙겼던 빼꼼이에게도 더 이상 발걸음을 하지 않았다. 빼꼼이를 보면 흰둥이 생각이 더 나고 슬퍼지기 때문에...
여전히 나는 그 길을 차로 지나다니고 있지만 차를 멈추고 언덕길을 올라가지는 않는다. 녀석은 흰둥이가 사라지고 나서 나의 발길이 뚝 끊긴 후에도 한동안은 내 차가 지나갈 때면 누워있다가도 벌떡 일어나 뚫어지게 차를 쳐다보았다.
그 간절한 눈빛을 뒤로하고 가버리는 나에게 마침내 기대감을 접은 듯,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되자 녀석은 내 차가 지나가는 소리에도 땅바닥에 누운 채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 차라리 그게 더 나을지 몰라. 너를 위해서도 나를 위해서도...'
연초의 변덕스러운 날씨는 겨울과 봄을 오락가락하는 듯 폭설이 내렸다가도 따뜻한 햇살과 선선한 바람을 몰고 오기도 했다.
아파트 단지의 동백꽃은 몇 번이나 피고 지고를 반복했다.
햇살 좋은 날에는 도로 위에서 뛰어다니는 백구들을 보았다.
어느 날은 양쪽 도로가에 주차되어 있는 차들 사이를 들락거리며 인도와 차도를 가리지 않고 활보하던 하얀색 개 한 마리가 길가에 놓인 쓰레기봉투 속에서 뭔가를 끄집어내어 허겁지겁 먹는 것이 보였다.
차의 속도를 줄여 가까이 접근하며 생김새를 확인해 보니 진도견이 아니고 삽사리를 닮았다.
앞으로 계속 전진하다가 반대편 차선으로 길을 건너려는 듯 서서 좌우를 살피는 다른 백구 앞에서 다시 속도를 줄였다.
흰둥이보다 작은 체구에 얼굴이 갸름한 그 개는 내 차를 피해서 주차된 차들 사이로 다시 들어가 버렸다.
위험한 길 위의 삶이다.
그렇게 나는 늘 흰둥이를 의식하며 같은 도로를 오갔다.
남편도 나처럼 빼꼼이를 찾아가지 않은지 3개월이 지났지만 새해가 되면서 다시 가끔 퇴근길에 녀석에게 들러 간식을 챙겨주기 시작했다.
그래서인지 빼꼼이가 다시 지나가는 나의 차를 유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녀석에게 늘 미안했고 지금도 미안하고 안쓰럽다.
하지만 무엇이 녀석을 위하는 일인지 알 수가 없게 돼버렸고 나의 사소한 선의가 언젠가는 또 가슴에 큰 아픔을 남기는 결과를 가져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빼꼼이를 가까이할수록 흰둥이에 대한 미안함이 더 커질 것을 알기에 외면하고 있는 나의 마음이 부끄럽지만 나는 마음의 문을 닫아버렸다.
보고도 못 본체, 내 마음이 아프지 않기 위해 모른 체하기로 한 것이다.
흰둥이가 지금 어디선가 살아있을지는 알 수 없다. 덩치 큰 진도견을 누군가 데려다 키운다는 것은 거의 확률 제로에 가깝다. 사람들을 피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용케 살아있더라도 언제 어디서 교통사고를 당할지 모르고 큰 개를 무서워하고 싫어하는 사람들의 돌팔매질과 공격을 당할 수도 있다. 흰둥이는 사람을 경계하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호의를 바라고 다가갔는데 그 사람이 개를 키우지 않는 사람이라면 위협적으로 느끼고 쫓으려고 할 것이다. 그러다가 점점 이 동네에서 멀리까지 나가게 됐을 수도 있다. 어쩌면 이미 이 세상에 없을지도 모른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 고작 평생을 묶여서 지내며 산책 한 번도 못 하고 혹한과 혹서와 외로움과 공포를 견디고 있는 불쌍한 개들에게서 시선을 돌려버리고 외면하는 것이라니...
그 불쌍한 생명들에게 미안하고 나의 양심에 부끄럽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전처럼 그들에게 다가설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