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래다, 그리고 바라다

by 잔결

평소 나는 무채색을 즐겨 입는다.

옷도 그렇고 내면도 그렇다.


독서를 하다 보면 파도처럼 밀려드는 글이 있다.

그럼 나는 그 페이지 귀퉁이를 정성스레 접어 놓는다.

몇 번이고 찾아 읽고 또 읽고 또 읽는다.

무명천에 염색을 하듯 나를 담그고 또 담근다.


문학만을 즐겨 읽던 시기가 있었다.

현실의 문을 넘기 전이었다.

당시의 나는 여리지만 수많은 색을 가진 사람이었다.

감정을 표현할 줄 알았고

가끔은 나보다 타인이 먼저였

꿈을 꾸었고, 꿈을 꾼다는 그 자체만으로 충분했다.

세상은 무채색이 아닌 수만 가지 색채가 유영하는

화폭과 같았다.


현실에 문을 넘었을 때,

내 앞은 무채색의 소용돌이였다.

감정을 감추는 법을 배웠고, 타인보다 내가 먼저였다.

하루하루는 멈춘 듯했고 인화되지 않은 흑백 필름

속에 갇힌 듯했다.

문학은 나에게 철부지의 잠꼬대 같은 것이었다.

돈, 투자라는 단어가 들어있지 않은 것은 관심 밖이었다.

햇빛을 오래 받아 색이 바랜 낡은 종이처럼

나 역시 지독한 현실의 볕 아래 속절없이 바래어 갔다.


현실이 나를 경험해 본 가장 어두운 곳까지 밀어

넣었을 때, 비로소 나는 읽어버린 색에 대해 기억했다.

낡은 종이에 물감이 한 방울 떨어졌고 바싹 말라있던

종이는 순식간에 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종이는 색이 바래기 전의 자신을 기억했다.

남아있던 결의 기억을 따라 물감이 번졌다.


'나를 살리는 글'이라는 누군가의 말처럼

글은 나를 살린다.

표현하는 법을 다시 기억하게 했으며

나를 통해 타인을 보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다시 꿈꿀 수 있게 해 주었고

어두운 터널 끝의 한줄기 출구가 돼주었다.


앞으로 나는 어떤 고유의 색을 갖게 될까.

나를 누군가와 나누고 싶다.

글은 표현이고 나와의 대화라고 이야기해 주고 싶다.

한 방울의 물감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