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성악을 전공한 레미콘 기사입니다.

by 잔결

일이 끝난 후 남성 전용 이발소에 왔다. 근래 돈벌이가 시원찮아 조금이라도 싼 곳에 왔다. 미용실은 2만 원. 여기는 1만 2천 원. 2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와 그 형인듯한 5살 아이가 머리를 자르고 있다. 윙하는 이발기 소리가 무서워 우는 아이를 보곤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저런 거나 무섭고 사탕 하나에 기뻐할 수 있다면 좋겠다.

이발사가 다가왔다. 어떻게 자르겠냐는 말에 짧게 다듬어 달라고 했다.

가운을 두르고 머리에 물이 뿌려진다. 이발사의 손은 거침없다 아무 감정 없는 그저 기계처럼 움직이기 시작한다. 수많은 반복을 통해 자동화된 손놀림이다. 과연 나에게도 저런 게 있을까 궁금해진다. 숨 쉬는 것 말고는 없는 것 같다.


고민이 많다. 해왔던 것, 하고 있는 것, 되고 싶은 것. 내 미래와 정체성에 대해.

뭐라도 하나 진득하니 밀고 나가고 싶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는 내 손에서 과연 타협점을 찾을 수 있을까? 답이 나올 리 없으니 이렇게라도 기록하고 싶어졌다.


나는 성악을 전공했다. 유학까지 다녀왔고 지금은 레미콘 운전을 한다. 되고 싶은 것은 작가.

남들 다 이렇게 살겠지 싶다가도 나만 이렇게 사나 싶다. 레미콘 운전은 유학 후 코로나를 발단으로 시작하게 됐다. 여러 시기적인 문제와 지역 시장성, 결혼과 아이 등의 문제로 떠밀리 듯 운전대를 잡았다. 아쉽지 않다면 거짓이겠으나 입에 풀칠하게 해 주니 어쩌겠나.


때때로 시 짓기를 좋아했고 노래라면 입에 달고 살았다. 스스로 대단한 예술인인 줄 알았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레미콘 운전을 한다. 내가 하는 일을 비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가끔은 과거와 현재의 그 괴리를 통해 자괴라는 감정이 나를 잠식하기도 한다. 하지만 자의든 타의든 새롭게 던져진 세상에서 많은 것을 배우는 중이기도 하다. 매일이 반복이고 다양한 사람을 만나는 일도 아니지만 나에 대해 알아가는 시간으로 채우고 있다.


종종 현장에서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면 책을 읽으며 생각에 잠기기도 하는데 대게는 실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는 그런 것들이다. 와이프가 알면 헛웃음을 터트리며 잔소리나 할 생각들이지만 나에겐 없으면 안 되는 시간이기도 하다. 온전히 사색에 잠길 수 있는 시간은 이런 시간이 전부기에 맘껏 즐긴다. 가끔은 그런 내 모습이 온전한 나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꿈에 빠져 사는 몽상가로는 아쉬워 글을 써보겠다고 이러고 있지만 쓰는 것도 어디 쉬운가. 그래도 뭔가 아쉬워 남몰래 숨겨놓듯 글을 쓴다.


글쓰기에 소양은 필요한가라는 질문을 달고 사는 중이다. 그냥 있는 그대로 써야 하는가. 뭐라도 머릿속에 집어넣고 비어있는 사고의 발출을 도모할 것인가. 무엇에 대해 쓸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끊이질 않는다. 어디선가 메모를 생활화해야 한다는 글을 봤다. 얼마 전부터 생각나는 질문과 글감이 있을 때 주저 없이 바로 메모한다. 그러다 보니 질문과 주제들이 서로 섞여 들기 시작하고 뭔가 나올 것 같다. 다음은 쓰는 게 문제인데 뭘 써도 다 마음에 안 든다. 글쓰기에 관한 책도 읽고 검색도 해보니 글도 써봐야 실력이 는다고 한다. 쓴 이의 마음에 완전하게 만족감을 주는 글은 없다고 한다. 일찍 보내야 한다고 한다. 모든 조언이 그렇듯 정작 스스로 깨닫지 못하면 받아들이기 힘들다. 똥인지 된장인지 먹어봐야 분간할 나이는 지난 듯한데 여전히 나는 그렇다.


브런치를 보다 보면 다양한 글쓰기에 대한 글이 올라온다. 알고리즘 탓에 유독 자주 보이는 것 같다. 덕분에 글쓰기를 주제로 글을 쓰기가 겁이 난다. 쓰고 내놓는 순간 그 대단한 예술인이 한낫 아류에 지나지 않다는 게 밝혀질까 두렵다. 보이지도 않는 스스로의 한계를 핑계로 우뚝 솟아있는 자존감이 다칠까, 그동안 버텨온 긍정을 가장한 자만이 자신 앞의 거울을 마주하진 않을까 겁이 난다. 한동안 관리되지 않은 번지점프를 준비하는 것 같다고 할까. 용기 내어 뛰어 보고 싶지만 다시 올라오지 못할 것 같다. 그래도 뛰어보련다. 이 번지점프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하고 싶은 게 없니.


하나, 둘, 셋

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