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비봉산은 그 많은 사연을 숨기고서 함구하는가."

제6화 집에 대한 단상-내 영혼에 흠집을 낸 자취방-비봉산의 메아리들 6

by 윤슬





다시 짐을 꾸리기 시작하였다.


당시 학교 다닐 때 [비봉산의 메아리]라는 라디오 프로가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우뚝 서 있던 저 산은 그 많은 사연을 숨기고서 함구하는가.


얼마나 많은 자취생들이 이 비봉산의 골과 골사이로 끌려 왔던 것인가. 얼마나 소리 없는 울음으로, 떨리던 그 갸느린 어깨의 들썩임 들을 속으로 삭이며 참아 왔던 것인가.


비봉산 아래의 자취방들과 산으로 오르는 시작점 사이는 경작하다 만 땅들이 널려 있었다. 그 사이 언저리를 따라가면 구멍 뚫린 울타리 철망들이 보인다.


자취생들이 버리고 간 카세트 테이프들이 내장이 흘러나온 채 널브러져 흐른다.


자기 생명이 곧 끝날 줄 알았으나 입술의 근육들과 생명은 붙어 있어 나를 먼저 살려주세요... 하면서 마치 처참한 현장의 한 장면같이 그 늘어진 테이프는 나를 가져가세요... 나를 들고 가서 당신의 카세트에 끼워줘요... 하고 외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일까. 그래서 그런 기운들이 내게 뻗친 게 아닐까. 나는 그중 주인도 알 수 없는 쓸만한 테이프들을 들고 와서 카세트에 꽂기도 했다. 당시 이문세와 푸른 하늘의 노래들이 있었던 거 같다.


남의 물건을 훔쳐서 쓸만한 것만 남기고 버리고 갔는지도. 당시 자취방엔 좀도둑이 하도 많아서 언니가 큰맘 먹고 사준 L사 인기 많던 그 모델의 슈즈도 방안에 놔두었는데도 훔쳐 갔다. 그때는 신발 하나로도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이 밀려왔다.


그렇게 우리는 많은 것을 잃기도 하고 또한 비봉산이 주는 그늘 아래 학교에서 그때만이 들려주는 감성으로 슬픔과 외로움 속에서도 온전한 어른으로 성장해 가기 위해 도서관에서 [테스]를 읽으며 울기도 하고 미술실에서 개울가에 앉은 그녀들의 은밀한 곳을 상상하며 자라났다. 핑크 레이디를 음미하기까지 그렇게나 말이다.




옮겨간 곳은 비봉산방향에서 내려본 왼쪽 J남고 주위 운동장 따라 난 좁은 길의 반대편이 나의 방 벽면이 된 곳이었다.


최대한 방을 많이 늘리려고 했을까. 벽면 중간이 약간 방안으로 돌출되어 있었는데 이곳은 길에서 보면 움푹 들어간 것이 어쩌면 연애하기 좋은 장소였는지도 모른다.


초록빛의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왼쪽 편과 오른쪽 끝에 방을 매달아 자취생을 받았다.


본채는 기와집처럼 꾸며져 마루가 있었고 정면에서 오른쪽 안채방도 자취생에게 내어 줬었다. 나는 이중에 젤 안쪽 J남고로 돌아가는 길이 내 방벽면이었으니.


어느 날 야간자율학습을 끝내고 들어와 보니 그 벽 끝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나는 아무것도 못하고 조용히 주저앉아서 그들의 대화를 엿듣고 말았다.


"지퍼내려" 남학생의 목소리.


"....." 멈칫거리며 우는 듯한 여학생 목소리.


나는 벽에 바싹 기대어 대체 어떤 상황인 건지 상상하기 시작했다.






*"뭐라고?

Y 그렇게 말하지 마.

너의 그런 태도에 나 화가 많이 났어.

너 오늘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미안해. J.

우리 이 길 따라 비봉산 올라가는 나무 계단까지 좀 걸을까."


"무서워. 시간도 늦었고.

오늘 Y 네가 무척 낯설게 느껴져."


"뭐가 무서워. 이 단단한 근육 좀 보라고.

누가 조금이라도 너에게 접근하면 가만 안 둘 테야.
좀 전 일은 정말 미안해..."


어두운 골목을 벗어나자 가로등 끝 주황 불빛 아래서 Y가 수줍게 웃으며 말한다.

무슨 일일까. 평소 다른 태도와 말투. 힘이 다 빠져 보이는 수척 해 보이기까지 한 얼굴.


우리는 좁디좁은 골목을 벗어나 비봉산 끝자락을 향해 걸어갔다. 산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으나 우리의 마음은 산 그림자를 인식 못할 정도로 무거워져 있었다.


"J 나 다른 곳으로 전학 가. 일전에 말한 그 이유 때문인데 결국은 다른 지역으로 가게 됐어."


"갑자기 그렇게까지 결정이 된 거야?
부모님만 가시고 너는 할머니와 여기 남으면 안 되니?"


Y의 부모님은 어릴 때 실종된 동생의 일로 제대로 된 일을 하시지 못하였다. 이후 전단지며 전국을 떠돌아다니다시피 하시면서 찾았으나 최근 D시의 신원미상의 냉동 보관 시신이 동생임이 밝혀지자 그로 인한 충격으로 하시던 일을 모두 정리하고 결국 시골로 내려가기로 하신 것이었다.


"J. 너를 처음 봤을 때부터 좋아했었어. 네가 버스 안에서 무거운 가방을 들고 서 있었지.

내가 그 가방을 받아 줬을 때부터 환하게 웃던 너의 미소가 내 안으로 스며들었어.

시골에서 들고 온 김치로 인해 내 교복에 빨간 물이 든 지도 모르고 좋아했어. “


"Y 우리 벌써 2년이 다 되어 가네..."


"J 나는 너의 첫 남자이고 싶어. 갑자기 오늘 한 행동 미안해.
네가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화내면서 말했을 때 내 이성이 돌아왔어.
내가 여기를 떠나게 되더라도 날 잊지 않길 바래."


마치 이별을 고하듯 그의 목소리는 잠길듯한 흐느낌을 토해 내고 있었다.


"왜 이래 오늘. 마치 더 이상 안 볼 사람처럼.

Y 네가 말했지? 나에게 [알퐁스 도데]의 별이란 책을 선물하면서.

기억나? 첫 문장이 [나의 스테파네트 아가씨 J에게]. 지금 생각해도 '우웩'이야.


너의 동생일은 다시 말하지만 정말 유감이야.


나는 네가 할머니와 같이 여기 남는 게 가장 최선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부모님 곁에서 그나마 네가 큰 힘이 될 거란 생각도 배제 못해. 그렇게 애절하게 내게 편지를 썼었던 너는 어디 간 거니? 우리 편지도 할 수 있고, 가끔 얼굴도 볼 수 있어. 나는 너의 영원한 스테파네트 아가씨가 되고 싶다고."


희미한 나무사이 불빛 아래 계단에 걸터앉아 서로를 마주 보고 앉았다.


"J 정말 고마워. 너는 늘 나보다 한 수 위야."


J는 살며시 Y의 이마에 입맞춤 후 그의 어깨에 살며시 기대었다.
시원한 비봉산의 밤바람이 그들을 감싸 안아 주었다.*



*-* 사실이 전혀 근거가 되지 않은 픽션임을 밝힙니다.

또한 일종의 데이트 폭력을 미화하고픈 생각은 추호도 없음을 밝혀두는 바입니다.

(그 J남고 자취방에서 두 고등학생의 얘기에 사실 화가 났습니다. 대화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으나 남학생이 여학생에게 뭔가?를 강하게 요구하는 목소리였고 그 여학생은 아무 말도 못 하고 당하고 있었던 것은 확실합니다.

제방 오른쪽으로 작은 문이 하나 있어 열고 나가면 채 1미터 남짓한 거리에 그들이 있었으나 말리지 못했습니다. 저도 어렸고 그들도 제 또래였기 때문입니다.

늘 희미한 기억 속에서 안타깝게 남아있던 장면을 어퍼컷 날리는 마음으로 풀어보았습니다. 어디선가 잘 살고 있을 그녀 또한 응원하는 마음으로.)






-다음 편에는 J교대 주위 자취방으로 옮겨 갑니다-



(덧붙임글)

이 글을 쓰면서 푸른 하늘을 떠올리다 [사랑 그대로의 사랑]이 생각났습니다.

피아노 선율로 잔잔히 시작되는 가운데 유영석의 숨 멎을 듯-아픔을 가득 숨기운 채 서서히 읊어 나가는

나레이션이 좋아요. 눈물이 울컥 나려 합니다. 영원히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이기에.

이 노래로 작은 선물을 대신하며 비봉산의 메아리들을 멈출까 합니다.


늘 사소한 이야기들을 읽어주신 독자분께 감사의 큰 절을 올립니다.

https://youtu.be/GXtX7QTUpqI

(푸른 하늘:사랑 그대로의 사랑. 시간이 나실 때 몰래 그때의 감성에 젖어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