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으로 흘러가는 파랑구름 위에 내 마음도 얹어본다"

집에 대한 단상 제5편-B시로 이사와서 독을 품고 살다 [단칸방시리즈]

by 윤슬





그날도 지금처럼 플라타너스 나뭇잎사이에 매미가 붙어 울고 있었을까.

매미소리는 여름을 알리고 그 언저리 어디 아득한 시골내음을 내게 풍겨온다.

그 대나무 평상 그늘 아래 팔베개 하고 누워 고향으로 흘러가는 파랑 구름 위에 내 마음도 얹어 본다.




할머니를 보내드리고 우리는 더 이상 그곳에 살 이유가 없어졌다.

완전 평지 도로로 내려왔다. 그곳은 B시 C동과 Y동의 그 언저리였다. S재래시장이 가까이 있었다.


주인아주머니는 당시 50대 후반에서 60대 초반으로 보이는, 늘 단발과 커트 사이의 머리형태를 유지하신 분이셨다.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은 그런 분이셨던 걸로 기억이 된다.


초록색 대문의 윗부분은 피뢰침처럼 생긴 방범용 모양이 덧대여 있었는지 모르겠다.

대문을 들어서면 일자로 단칸방 3동이 줄지어 있었다.

방은 부엌이 달린 형태였으며 안에서 음식을 조리하기도 하고 간단한 샤워도 가능하게 되어 있었다.

바깥 반투명 유리로 된 현관이랄 것도 없는 문은 늘 자물쇠를 채워 둔 기억이 있다.

우리가 살던 곳은 주인집과 제일 가까운 안쪽 동이었다.

바로 옆방은 아저씨가 혼자 사신 것 같은데 서로 교류가 없다 보니 정확히 기억은 나질 않는다.

초록 대문에서 제일 가까운 곳은 젊은 부부와 두 명의 개구쟁이 남자아이가 살던 가구였다.


주인댁은 젤 안쪽에 위치해 있었으며 시멘트 칠이 된 작은 마당에는 플라타너스처럼 잎이 큰 종류의 나무가 한그루 우뚝 솟아 있었다. 나무 둥치는 밝은 연회색이었던 걸로 기억이 된다.

주인댁 왼쪽 편엔 옥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위치해 있었고 그 계단 밑으로는 백등유를 넣는 기름보일러 실이 있었다. 이 기름이 얼마나 있었는지를 두고 주인아주머니랑 실랑이를 벌인 적인 있었던 거 같다.

(어찌 보면 집시리즈 중에서 가장 최근 일인데도 기억은 제일 가물거리는 것 같다.)




한 번은 마트 근처에서 집으로 오고 있었다.

짙은 초록색 자가용에서 우리 집에 같이 살던 젊은 아빠가, 차에서 내리면서 열쇠로 문을 잠그는 것을 봤다.

당시 정말 놀라웠다.


'아 저분은 이런 곳에 살아도 차가 있구나. 저 차로 4명의 가족이 얼마나 편하게 다닐 수 있을까."


나는 부러움이 가득 한 눈으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주인집에는 아들이 한 명 있었는데 뭘 하는 사람인지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밤 11시가 넘어 아르바이트를 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당시 유행하는 스타일이었는지도 모를 나의 옷차림이 기억이 난다.

위에는 허리까지 내려오는 베이지 셔츠를 입고, 미디엄의 타이트한 짙은 커피색 골덴 스커트(테일러드)에 허리에는 가는 가죽 벨트로 셔츠를 잡아주었다.


"어 저기. 잠깐만..."


11시가 넘은 시간이어서 동네 오빠야? 들이 이유 없이 지나가는 여대생들을 불러 세우기도 했다.

그때 주인집 아들도 무리에 끼어 있었다.


"야 물러서. 우리 집에서 자취하는 학생이다. 건드리지 마라."


아직도 생생히 기억에 나는 이 장면은 웃음이 배시시 새어 나게 만든다.
참으로 주인집 아들도 나도 풋풋한 시절이었지.

그렇게 쉴드를 쳐주어 정말 고마웠다.




한 번은 아버지가 안 계신 중에 하늘색과 파란색으로 된 아주 작은 정사각형 타일로 된 부엌 안에서 배가 너무 아파서 데굴데굴 구른 적이 있었다. 나중에 안 이유는 체해서였다. 체할 만큼 먹은 것도 없는 시절 뭣 때문에 그리도 체했는지. 얼굴은 하얗게 질리고 토할 거 같은데 나오는 것은 없고. 얼마나 화장실을 들락날락거렸을까.

정말 곧 숨이 넘어갈 것만 같았다. 이렇게 아프다간 죽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해결책은 어떻게 해서든지 목구멍에 손가락을 넣어서 다 토하는 것이 답이었다.

혹시 혼자서 해결을 못한 채 있다가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지금까지도 들깨를 두유에 갈아먹다가 심하게 체한 일 말고는 역대급일이었다.)




당시 다니던 교회에서 주일학교 교사를 하다가 큰 교회로 옮기게 되었다.

왜 그랬는지 잘 모르겠다. 교회를 옮긴 이유를.

그 큰 C교회의 청년회에서는 C교회 목사님 의대 다니는 딸(같은 나이였는데 참으로 거리감이 느껴졌다.)과 결혼을 약속한 중소기업 사장아들과 언니, 나보다 서너 살 위인 H 쪽 병원 다니는 간호사 언니, 근처에서 작은 회사에 다니던 언니, 그리고 문제의 신학대학에 다니던 31살 무렵의 오빠(다들 교회오빠였지.) 등등이었다.


당시는 교회에 오래 다닌 미혼의 여자들은 전도사님이 되실 분들, 혹은 신학대학을 다니는 분들을 우러러보았으며 기도제목을 얘기하라고 하면 은연중에 목사 사모가 되는 것이었다.


작은 봉고를 렌트해 YS근처로 청년회 야유회를 다녀오던 길이었다.

느닷없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나는 것은 그때 입은 옷이다.

짙은 샛노랑으로, 세로로 꽈배기 처리가 된 목까지 올라오는 터틀넥을 한번 접어서 입고, 봉고 젤 뒷칸에 앉아 있었다. 그때 갑자기 그 신학대학에 다니던 오빠(나이차가 많이 나서 선뜻 오빠라 부른 적은 없다. 지금 생각하면 별로 차이가 안 나게 느껴지지만.)가 내 옆에 바짝 다가왔다.


그러면서 아무도 의식 않고 내 의사도 반한 채,
내 손을 꼬옥 잡았다.




-다음 편에 계속-




(윤슬작가의 변)


글을 다 써놓고 [생각]이란 것을 해보니 내가 그렇게 미인이었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듭니다.

이런... 이전에 아무리 예뻤다 하더라도? 나이가 들면 다 쓸모없다는 생각도 들고요.

너무 서글퍼지네요...


당시의 집들은 하나도 없이 밀리고 유명 메이크의 아파트가 다 들어섰습니다.

그 가운데 재래시장은 이름도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좌:5월 어느 날 가본 그곳. 재래시장만 그대로 있다./우:옛 모습은 간데없고 고급아파트만.)

지난 일들을 추억하는 것은 아프기도 하여 쉽게 쓸 수가 없습니다.

혹시 기억의 파편이 완전히 틀릴 수도 있어 여러 번 검색도 하고, 단어도 수정하고,

또 기억이 안나는 단어는 찾아도 보고. 처음 집시리즈를 생각할 때는 집에 대한 얘기를 하리라

생각했는데 모든 기억 속에는 역시 사람... 사람이었습니다.

그기다 이번에는 옷까지 끼어들어 진한 커피색깔의 골덴 치마나 샛노랑 터들넥까지 등장하네요.

기억이 기억을 물고 오고. 비까지 오고 매미마저 울어대니 상념에 젖어 들어 글이 오래 걸렸습니다.


남은 하루도 잘 마무리하시고 기분을 잘 관리하시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저부터요.)

저의 너무도 사소한 얘기들을 읽어 주시니 정말로, 진심으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