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서 처음으로 일어났던 일이며 아직도 미스터리로"

제8화 집에 대한 단상-내 영혼에 흠집을 낸 자취방-현 남강로 주위

by 윤슬






무릎을 꿇고 울고 있었다.

아니 눈물이 범벅이 되고 온몸을 흔들면서 회개의 기도를 하고 있었다.


하나님 용서해 주세요.

제가 시내버스를 타면서 돈이 없어서 50원짜리를 토큰처럼 넣고 탔어요.

제가 동생을 조금이라도 미워한 맘이 있다면 용서해 주세요.

배가 너무 고파서 자취방 주인집 마루 밑에 있던 싹이 난 감자를 들고 와서 몰래 먹은 것도 용서해 주세요.

한 달 수입이 조금이라도 생기면 십일조로 10원도 안 내고 다 먹는 걸로 쓴 것을 용서해 주세요.

(목사님께서 돈을 벌지 않는 사람이나 학생은 용돈을 받으면 1주일 단위로 천 원씩이라도 내라고 하셨다.)

자취방 앞 땅주인을 모르는 작은 밭의 썩은 거름 옆에 제철이 지나 싹을 틔워 난 노란 참외 몰래 훔쳐 먹은 것 용서해 주세요.

친구 J를 미워하는 마음 가진 것 용서해 주세요. J의 엄마를 부러워한 것 용서해 주세요.

옆 방 자취생에게 미운 마음 가진 것 용서해 주세요.

이유도 없이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한 모든 것을 용서해 주세요.

제발 저의 모든 잘못을 다 아시고 계시는 하나님 죽을죄를 지었어요.

저를 가만히 두지 마세요.

다 용서해 주세요. 제발...... 제발요.


눈물이 멈추지 않았고 중얼중얼 무릎을 꿇고서 허리를 숙인 채 머리를 방바닥에 조아리면서 그렇게 울고 또 울었다. 무슨 이유인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고 눈물이 멈추지 않는 것이 괴로울 정도였다.

금방 회개를 했는데 또 회개할 거리들이 끊임없이 밀려와 주체할 수가 없었다.

회개할 사건의 순서도 없고 온통 너무 잘못해서 더 이상 살 수 없는 지경이 된 내 사악한 모습에 넌더리가 날 지경이었다.


얼마나 지속해서 기도를 했는지 지금은 정확한 기억은 없다. 얼굴은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되었다.

이윽고 모든 회개를 끝낸 뒤 깊이 잠들어 있는 동생옆에 자려고 누웠다.


앙와위로 누워 있는데.

갑자기 발끝부터 뜨뜻한 액체가 차오르는 듯 그 기운이 다리를 통과하면서 서서히 상체로 퍼져왔다.

순간 놀랐다. 그 뜨뜻한 기운이 느껴지는 가운데서도 무섭고 두려운 마음까지 들었다.

발끝부터 올라온 그 뜨거운 기운이 머리까지 올라와 마지막으로 마무리하듯 머리 둘레로 뱅그르르 돌면서 회전하는 기분이 들었다.


바로 그때,

자취방 바깥에서 플래시 등불 같은 것이 우리 방문으로 눈이 부실 정도로 비쳤다.

너무 불빛이 강하여서 눈을 뜨려고 했으나 두려운 마음이 들어 뜰 수가 없었다.

계속 마음속에서 불빛의 존재를 확인하라고 속삭였는데도 결국 눈을 더욱 질끈 감았다.

아주 짧지만 강한 그 불빛이 내리 쬐이듯이 비치더니 플래시 불이 순간 버튼을 누르면 사라지듯이

없어졌다.

(그 당시 혹시 누가 휴대용 후레쉬를 켠 걸까 생각도 했으나 아무 발자국 소리도, 소음도 나지 않았었다.)


그제야 너무 놀라 일어났다.

동생이 자취방 문쪽 바깥에 자고 있었기에 흔들어 깨웠다.


"일어나. G야 너 금방 그 강한 햇볕 같은 빛 못 느꼈어?"


"아. 왜 이래 자고 있는데 깨워서는..."


"너무 무서워서 그래. 아니 못 느꼈느냐고? 그렇게 내리 쬐이듯이 빛을 쏘았는데도?"


"응. 무슨 빛이 났다고 이상한 소리 하고 그래."


동생이 자도록 내버려 둔 뒤 시계를 봤다.

새벽 3시 5분경이었다.


이 일은 동생과 J시 GH여고 자취방에 살 때의 일이다.

이 일은 지금까지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일어났던 일이며 아직까지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여기서 동생과 싹이 난 감자나 푸른 감자를 많이 먹어 배가 아픈 적이 많다.

(가사시험에 늘 나온 복어독과 감자독 솔라닌은 잊을 수 없는 주제이기도 하다.)

나름 이 자취방에서는 미술 작품도 걸어 두곤 했다. 문방구에서 2-3천 원 정도 하는

밀레의 만종 같은 작품을 코팅으로 팔았는데 이 작품을 유독 좋아하여 늘 벽면에 테이프로 고정해 두었다. 끼니를 거르진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늘 감사하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가끔 맘속으로 되뇌곤 했었다.




T전자부품 공장의 통근 버스 아저씨는 몇 살이냐?부터 여기서 내려 어디에 사느냐? 호구 조사까지 했다.

마치 어린 나를 자기 아들에게 시집이라도 보낼 요량으로 말이다. 이후 한 번의 치근덕거림이 있은 후 통근 버스를 타지 않았다.




여기는 대체로 그나마 젊은 노년부부가 주인이었다. 남향으로 들어선 집의 왼쪽으로 해서 뒤쪽까지 자취방을 만들어 바로 학교 옆이라 빈방이 없을 정도로 많은 여고생이 묵었다. 대문은 파란 철문이었던 걸로 기억이 나는데 유일하게 성폭행과 관련된 풍문이 없었던 곳이기도 하다. 철문 바깥으로 나가면 대부분 단독주택에 자취생을 받는 곳이었으며 제대로 개발이 되지 않아 대문 맞은편 임자 없는 텃밭에는 수박덩굴이 구르기도 하고 가끔 철 지난 참외가 올라오기도 하며 깻잎이 아무렇게나 심겨 있었다.


지금은 이곳에 가면 옛날 모습을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큰 댐이 일찍부터 들어와서 지형을 바꾸고 거의가 조경나무농원으로 비닐하우스도 많았는데 N강을 중심으로 고급 아파트들이 즐비해서다. 당시 좁은 1차선 도로들도 시원하게 달리는 고속도로 마냥 뚫리고 우리가 한 번씩 가던 JY호도 동물원과 합쳐져 낯선 곳이 되어 있었다.


[장 프랑수아 밀레의 만종(좌), 이삭 줍는 사람들(우)]



-다음 편에 계속-

(집에 대한 단상은 이제 J시에서 B도시로 넘어갑니다.)


(덧붙임글)

1. J시는 정말로 아름다운 도시입니다. 저의 고등학교 시절과 20살 무렵의 추억을 그대로 간직한 채 지금도 N강은 도도히 흐르고 있고요. 다리 교각밑의 두꺼운 황동반지는 갈 때마다 놀라움을 자아냅니다. 저의 고장은 40여 명이 넘는 의병장들이 300여 차례나 항일 투쟁을 벌인 유서 깊은 곳입니다. 제 자랑이 아니니 좀 많이 했습니다.^^


2. 오늘 새벽 0시경부터 어제 있었던 일 일기로 저장하고, 집에 대한 단상을 너무 미뤄왔어서-머릿속이 복잡해서 가벼운 글만 쓰고-새벽 2시 반부터 오전 10시까지 한숨도 안 자고 두 편을 썼네요.

다 쓰고도 스무 번 이상 쳐다봐도 잠을 안 자서 인지 더 이상 글이 고쳐지지 않네요. 사실 들고 있어 봐야 별 수도 없으면서 이러고 있어요. 정말이지 글을 읽어 주시는 한 분 한 분이 얼마나 소중한지요. 아직 초보인 제게 큰 힘이 되니깐요.

저 또한 그런 소중한 분이 되어 드리고 싶습니다. 하루하루 더 나아지고 철이 들어가고… 이제 소파에 기대어 큰아이 피아노 소리와 선풍기 덜덜 거리는 소리 들으며 잠이 오면 한숨 자야겠습니다.


제 마음을 보여 드리고 싶습니다. 너무 오래 미워 마시길 바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