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대한 단상제1편-B시로 이사 와서 독을 품고 살다 [단칸방시리즈들]
동생은 못 먹은 상태로 눈에서 피가 나도록 공부해 내가 그렇게 가고 싶었던 J교대에 들어갔다.
수학여행 갈 돈이 없어서 그토록 애가 달던 자취방도 밀레의 만종이 걸려있던 여기였다.
내 방이 필요해서 혼자 쓰던 방을 연두색 커튼으로 분리시켰던,
주인이 없던 ㅁ자형 자취방에 있었던 그 많은 선생님이 될 J교대 언니 오빠들이자 교회 선생님들이 대학생이 된 것이 너무나 부러웠다. 그 자유로움. 늦게까지 모임을 가지고 토론을 하던 모습들.
그 속에서 공장에 다니면서 야근을 하던 나.
전자부품 공장에서 제일 첫 작업과정에서의 일을 배워나가던 중에 두어 달을 못 채우고 그만두었다. 공부를 안 한 것이 절절히 후회가 되었다.
"아기. 너 [PERHAPS LOVE]에서 perhaps가 무슨 뜻이야?"
"아기 같은 S야. 너 오늘 엄마가 입던 블라우스 입고 왔어?"
"야 저기 봐봐. S가 목에 리본을 크게 묶은 옷을 입고 왔는데, 엄마 옷 같지 않아?"
아직도 공장에 출근해서 모두 다 언니들인 사람들이 나름 나에게 친근감을 표시하면서 건넨 말들이지만
잊히지 않는다. 아니 아주 생생하게 들린다. 비웃는 듯이 웃는 듯이 건넨 말들이.
그중에 모두 흰색의 유니폼 같은 것으로 갈아입었는데 유독 한 분만 상의가 검정이었다.
그분들 말에 의하면 10년 넘게 근무했으며 여기서 대빵이라고 말해 주었다.
다 지난 일들이지만 지워지지 않은 내 인생의 한 장면들이다.
공부를 해야겠다. 죽도록 공부를 해야겠다. 나는 머리가 나쁜 아이는 아니다.
하면 된다. 그 당시 수없이 되뇌며 재수를 하기 위해 H학원 원장님을 찾아갔다. 아마도 장로님이셨던 그분을 만나면 도와주실 것 같은 생각이 들었었다.
풍성한 체격에 네모난 얼굴을 한 턱이 두툼하시던 L원장님. 체격에 비해 가는 목소리로 응원해 주시면서 학원비를 감면해 주셨던 분이다. 열심히 다니고 열심히 공부를 했으나 원하는 대학은 녹록지 않았고 떨어졌다.
그 후 L원장님께선 벼룩시장 같은 곳에 광고된 조무사를 배출하는 OO간호학원 종이를 오려서 내게 주셨다. 너무나 고맙지만 저는 무슨 일이 있어도 대학에 들어갈 겁니다.
시골에서 풀을 뜯어서 김치를 담그시며 치매의 정점을 향해 내달리던 할머니와 늘 굶고 다니며 옷 한두 벌로 학교에 다니던 동생을 뒤로한 채 아버지가 계시는 B시로 상경하였다. 당시 아버지는 조그만 회사의 경비실을 지키고 있었다.
내가 묵게 될 곳은 B시 Y동 달동네였다. 단칸방에 아버지와 둘이 살게 되었다. 아버지가 밤근무를 하시면
그 좁은 부엌방이 딸린 곳이 모두 내 차지가 된 것처럼 기뻤다.
또한 아버지는 알고 지내던 아줌마가 계신 곳에 가서 자고 오시기도 하셨다. 공부를 포기할 수가 없었다. 당시 다니던 교회에서 초등학생들을 4-5명 모아서 교회에서 학습지로 과외를 할 수 있게 만들어 주셨다.
용돈도 벌면서 2학기가 되면 다시 학원에 등록해서 공부할 생각만 가득하였다. 희망이 있으니 지치지 않았다. 반드시 이루고 말 테니까.
달동네는 지리가 높아서 오르내리기 힘들었지만 바깥 수돗가에서 내려 보는 풍경은 정말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지금은 이렇게 살고 있지만 꼭 성공해서 달동네라도 내 집을 갖고 싶다. 내 집. 내 집을 말이다.
주인에게 매달 월세를 내지 않고 눈치도 보지 않는 곳에서 살고 싶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할까.
그렇게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이었다.
"S야 너 왜 그래?"
"아저씨 저 너무 아파서 죽을 거 같아요."
아버지께 한 번씩 놀러 오시던 시골에서부터 알고 지내던 아저씨의 등에 업혀 그 굽이 굽이 좁은 달동네 내리막길을 달리고 있었다.
(근 30년 만에 가본 달동네 풍경. 한가운데 사진은 직접 보니 인상적이었고 4번째 사진도 함께 보면 지대가 꽤 높았음을 알 수 있다. 집들이 다 밀려서 사라지고 산밑에 큰 도로가 났으며 유명메이커 아파트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