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숙이의 호수
IMF는 누구에게는 기회였고, 누구에게는 힘든 삶의 시작이었다. 부도난 시멘트 공장은 경매 넘어가기 바빴다. 시멘트 공장의 빚은 고스란히 아버지에게 넘어왔다. 세상사는 눈이 어둡던 아버지, 어머니에게 빚은 아예 눈을 가려버렸다. 돈 갚으라는 독촉은 하루에도 몇 번이고 낮동안 딸 들만 있는 집으로 찾아왔다. 출근길이면 딸들에게 '아빠 있는 곳 말하면 절대 안 돼. 절대 그럼 우리 집 큰일 나. '라고 잊지 않고 몇 번이고 말을 했다. 아버지는 신용불량자가 되어 정규 취직을 하지 못해 저기 먼 서울까지 일을 하러 가셨다. 고작 7살밖에 안된 여동생이 아버지가 거치하시던 집을 갔다 와서는 눈물을 흘렸다. 쓰레기장 같은 곳에서 산다며 눈물을 흘렸다. 어머니는 안 해본 일이 없다. 단감을 따서 길가에서 팔 때면 얇은 천막 아래 혼자 앉아서 라디오를 듣고 있었다. 나와 여동생은 어머니가 보고 싶을 때면, 걷고 걸어서 거기까지 갔다. 엄마는 우리를 가장 따뜻한 곳에 앉혀 감을 깎아주곤 하셨다. 차가 지나가는 큰 도로에 있어서 위험하게 여기까지 왔냐며 혼날 때도 있었지만, 어머니가 있는 곳이 제일 안전했고, 무섭지 않았다. 겨울바람이 천막에 다 들어와서 휩쓸고 가더라도 그곳은 너무 따뜻해서 잠도 잘 수 있었다. 그 후 똑똑한 어머니께서는 공공근로를 신청해서 비정규직으로 다니셨다. 산이고 들이고 다니시며 쓰레기를 주우셨다. 어머니는 큰딸을 가진 후 천식환자가 되어 숨을 다른 사람의 반 정도만 쉬면서 살았다. 기관제 확장제가 없으면 살 수가 없었고 천식으로 119를 타고 병원을 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목욕탕도 혼자 가지 못하셨다. 그리고 매일 몰아치는 돈 걱정은 숨을 더 못 쉬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생각했다고 한다. '이렇게 어떻게 살겠나', '100원도 없는데 몇 백, 몇 천의 빚을 어떻게 갚아야 하나.' 그리고 발걸음은 그 지역에서 제일 큰 호수로 향했다. 신발은 벗지도 않고 한걸음 한걸음 걸어 들어갔다고 한다. 그때, 뒤통수에서 누가 머리카락을 당기는 기분으로 머리가 뒤쪽으로 젖혀졌다고 한다. 그때,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았고 집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딸 둘에게 갔다고 한다. 그 무렵 우리 큰 이모 꿈에 외할머니가 나오셔서 '숙이 죽는다. 숙이 살려라'라고 하셨다고 한다. 4명의 이모들이 모으던 곗돈과 큰 이모가 개인 돈을 더 보태서 우리 집으로 오셨다. 급한 불부터 끄라고. 어머니는 말없이 우셨고, 한없이 미안함에 사무쳤다. 글을 써 내려가며 내 눈에 눈물이 맺힌다. 큰이모, 서울이모, 대구이모, 마산이모는 늘
나의 자랑이었고, 어머니의 친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