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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고 Aug 03. 2024

로봇청소기와 온라인 장보기

  점심 약속이 있다. 출발하기 전까지 시간 여유가 없다. 5분 안에 준비를 마치고 나가야 한다. 안방에서 옷을 갈아입고 있는데 갑자기 싱크대에서 물 트는 소리가 들렸다. 또 로봇청소기의 짓이다. 오늘도 어김없이 싱크대 바닥의 절수 페달을 밟고 지나갔을 것이다. 얼른 물을 끄러 가야 하는데, 뒷 지퍼가 있는 원피스를 입으려니 등 뒤로 손이 잘 닿지 않았다. 뒤늦게 부엌으로 나왔다.물이 흘러넘쳐 바닥까지 흥건했다. 아까 밥을 안치려고 물을 받느라 수전을 싱크볼 바깥으로 돌려놓고 안으로 옮기지 않았던 것이 생각났다. 잠깐의 게으름 때문에 고생길이 펼쳐졌다. 쓰레받기로 물을 퍼내야 할 정도로 많은 물이 흘러넘쳤다. 뒤이어 마른걸레로 물을 흡수해 싱크볼에 짜서 버리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 게다가 로봇 청소기 위로도 물이 많이 떨어져 청소기가 지나간 자리를 따라 물길이 이어졌다. 약속까지 남은 시간이 빠듯한데 로봇청소기가 말썽 부린 일을 수습하고 있으니 헛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내가 외출하기 전에 이 난리가 나서 다행이다. 외출한 후였다면 나보다 먼저 집에 도착할 초등학생 딸이 당황했을 것이다. 전화로 상황을 알리며 어린애가 수습했을 생각을 하니 상상만으로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바닥의 물기를 남김없이 닦은 후 청소기를 살펴보았다. 청소기 속으로도 물이 잔뜩 들어갔다. 청소를 중단하고 물이 흥건한 먼지통을 비운 후 씻어 말렸다.


  약속시간을 훨씬 넘긴 나는 지인을 만나자마자 변명하듯 하소연했다. 그 친구도 나와 같은 제품을 쓰고 있다고 했다. 절수 페달 주위를 앱으로 막아 놓으면 해결되는 간단한 문제라고 알려줬다. 처음 로봇청소기를 샀을 때 어플 연동을 시도했지만 하지 못했다. 지금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인터넷 연결 문제 거나 핸드폰 기종 문제였다. 늘 새로운 기능을 배우고 익히는 게 귀찮고 어렵게 느껴졌는데, 연결이 안 된다고 하니 오히려 홀가분한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스마트한 생활을 포기하고 직접 바닥에 놓인 물건을 치우면서 청소기를 돌렸다.


  최근  70이 넘은 친정 엄마가 점점 장을 보기가 힘에 부쳐 온라인 장보기를 배워보겠다고 했다. 어플을 깔고 상품을 장바구니에 담는 것까지는 잘 따라했다. 주소를 확인한 후 결제를 해야 하는데, '쿠폰 적용하기, 결제 전 약관에 동의하기' 등이 익숙해지지 않았다. 약관에 동의하라고 핸드폰 창에 팝업이 뜨면 두려워했다.  팝업창이 경고장으로 보이는지  크게 잘못했다는 생각에  내게 도와달라며 구원의 눈길을 보냈다. 그렇게 처음 배운 후 2번째 장보기까지 한참 걸렸다. 집에서 혼자 해 보니 잘 기억이 나지 않아 주문을 할 수 없었고, 오랜만에 나를 만나면 처음부터 다시 배웠다. 그렇게 늘 제자리걸음이다. 몇 번을 반복했지만 아직도 혼자 온라인 장보기를 하지 못한다. 답답하기 짝이 없다.


  그런데 이것이 엄마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친구의 조언으로 깨달았다. 그 사이 로봇청소기를 처음 사용했던 집에서 이사도 했고, 핸드폰도 바꿨다. 시도해 보면 어플이 연동될 수도 있다. 친구 말대로 앱을 열고 싱크대 앞을 블로킹하면 간단히 해결될 문제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청소기가 절수 페달을 밟고 지나가면 직접 가서 물을 끈다. 친구가 볼 땐 답답하기 짝이 없는 노릇일 것이다. 다음에 친정 엄마가 온라인 장보기를 가르쳐 달라고 하면 친절하게 알려줘야겠다.


새로운 것을 배우는 일은 귀찮고 어려운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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