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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고 Aug 27. 2024

미안한 방탈출

  여름 방학이 길었다. 마냥 집에 있기 지루했던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쑥덕거리더니 유튜브에서 본 적 있는 방탈출 카페에 가자고 했다. 나도 어디선가 초등학생도 가능한 방탈출 카페가 있다는 걸 들었다. 이것이 내가 아는 방탈출 카페의 전부다. 방을 탈출한다는 컨셉은 이름으로 예측이 가능했다. 그 안에서 어떤 방식으로 탈출하는지 전혀 아는 게 없었다. 유튜브에서 본 아이들은 알고 있겠지.


  아이들은 가고 싶은 방탈출 카페를 찾아 내게 알려줬다. 카페 위치를 듣고 검색해 가장 빠른 시간으로 예약했다. 바로 출발했다. 가는 동안 아이들은 두근대는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소란스럽게 떠들어 댔다. 도착한 카페의 카운터에는 직원이 없었다. 멀리서 청소기 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예약한 시간에 맞춰 왔으니 청소를 금세 끝내고 카운터로 돌아올 것이라 생각했다. 조금 서서 기다렸다. 그런데 청소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직원분을 찾아 안으로 들어갔다. 방문 앞에서 노크를 했는데, 그분은 인적 없는 공간에 서있는 나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우리는 서로 ‘죄송합니다 와 아니에요. ‘를 반복해서 주고받았다.

  예약하고 왔다는 내 말에 직원분이 예약 내역을 확인했다. 잘 찾을 수 없는지 이름을 재차 물었다. 한 시간 전에 예약해서 업데이트가 안된 건지 의아한 마음을 갖고 나 역시 폰으로 찾아보았다. 당당하게 예약 페이지를 펼쳐 핸드폰을 직원분께 내밀었다.

- 아 여기는 저희 가게가 아니라 옆 가게입니다.

- 네? …

  또다시 죄송하다고 말씀드리며 카페를 나왔다. 검색 페이지 상단에 광고로 올라온 카페를 잘못 예약한 것이다. 늘 대강 찾아보는 습관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놀랍지도 않다. 다만 엉뚱한 곳에 찾아가 엄한 사람을 놀라게 하고 나온 것에 대한 미안함이 생겼다. 방탈출 카페의 첫 단추를 잘못 꿴 채 옆 가게로 옮겼다. 미안한 마음은 두 번째 가게에서도 내 마음을 지배하게 된다.


  두 번째 가게의 직원분은 예약자인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소지품을 보관함에 넣자마자 방 탈출 방법에 관한 설명이 속사포처럼 이어졌다. 직원은 세 종류의 자물쇠를 보여주며 푸는 방법을 알려줬다. 이때도 나는 방을 탈출하기 위해 자물쇠를 여러 번 열어야 한다는 것을 몰랐다. 그저 그동안 본 적 없는 자물쇠 구경이 신기했고, 저 설명이 끝나면 진짜 초등학생도 탈출이 가능한지 확인해 봐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난이도에 따라 입장할 수 있는 방이 달랐다. 나는 당연히 제일 쉬운 단계를 예약했다. 직원분은 초등학생이 탈출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으며, 개인차가 있다는 모호한 답변을 남긴 채 우리에게 안대를 씌웠고, 깜깜한 어둠의 세계로 인도하였다.


  대개 어린이 체험 공간에 가면 부모는 보호자 역할을 수행하며 함께 따라다니기만 하면 된다. 아이들을 뒤에서 잘 지켜보겠다는 마음가짐과 체력만 있으면 된다. 이번에도 방관자 모드로 방탈출 카페에 발을 들였다. 앞으로 내게 펼쳐질 일을 짐작하지 못한 채.

  

  어둠이 걷히고 눈에 들어온 건 아주 작은 공간이었다. 흥분한 아이들은 정해진 한 시간 안에 빨리 이곳에서 나가야 한다며 수선을 떨었다. 내 손엔 문제에 대한 힌트를 받을 수 있는 핸드폰 하나가 들려 있었다. 카페에서 제공한 것이다.  2칸짜리 서랍장 위에 글씨가 적혀 있는 작은 액자가 있었다. 문제를 읽고 암호를 푸는 형식이었다. 그런데 암호가 한글이다. 숫자 자물쇠를 열어야 하는데 이 한글 조합은 무엇일까? 이렇게 고뇌하는 이유는 액자 속 글을 다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그 뜻을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초등학생 아이들 두 명은 문제를 쓱 본 뒤 일찌감치 포기하고 '믿을 구석은 엄마뿐'이라는 애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총 세 번의 힌트 중 첫 번째 찬스를 써야 할 것 같다. 첫 문제부터 힌트를 받는 것이 탐탁지 않지만, 문제에 대한 감을 잡아야 두 번째 문제도 풀 수 있을 것 같았다. 전화가 연결되었고 직원은 단조로운 목소리로 아주 짧은 힌트를 주었다. 물론 이해할 수 없었다. 친절함이 배제된 목소리에 질문을 이어가기 어려웠다. 힌트를 받았으니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하는데 아리송함은 더욱 커졌다. 문제를 풀고 싶은 마음보다 내가 이걸 왜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만 더 키웠다. 꼬리에 꼬리를 문 생각이 방금 지불한 입장료에 닿았고, 이건 내가 해야 할 의무라는 책임감이 바로 생겼다.  


  결국 두 번째 힌트를 사용했다. 두 번 들어도 모르겠다. 이 정도로 헤매고 있으면 네 자리 숫자 중 첫 번째 숫자라도 알려줄 만도 한데, 직원은 투철한 직업의식으로 무장한 채 매뉴얼대로 힌트를 알려주었다. 와! 이런 정신으로 아이들을 가르쳐야 했다. 특히 수학 문제집 풀 때 답답한 마음이 앞서 스스로 할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답을 내주던 나를 반성한다.

  세 번의 힌트 중 두 번을 써 버렸지만 방탈출 성공 희망의 끈을 놓지 못한 딸아이는 마지막 힌트는 아껴두고 엄마가 알아서 해결하길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주제파악이 빨랐다. 다행히 이 카페는 힌트를 무제한으로 제공해 주었다. 딸아. 방탈출 성공 따위는 포기하고 자물쇠 하나는 한번 열어 봐야 하지 않겠니?


  마지막 힌트를 듣고 마침내 풀었다. 세 개의 힌트를 모두 써 버린 게 아쉬워 시무룩했던 아이들의 표정이 이제야 밝아졌다. 서랍장에 달려있는 자물쇠를 열었다. 서랍 안에 또 다른 액자가 나왔다. 하. 이곳은 마치 꺼내도 꺼내도 계속 나오는 러시아의 마르료시타 인형과 같았다. 그제야 문제와 자물쇠가 끊임없이 펼쳐질 것이라는 걸 알았다. 첫 번째 방의 자물쇠 세 개를 열 때까지 직원과 얼마나 많은 통화를 했는지 모르겠다. 긴 통화 끝에 드디어 방 문을 열었고 또 다른 방으로 이동했다. 새로운 공간을 마주하자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그런데 이곳의 자물쇠는 입장할 때 처음 봤던 ‘방향 자물쇠’다. 신기한 마음에 갇혀 자물쇠 여는 방법을 대충 흘려들었다. 물론 아이들도 직원이 해준 설명을 기억하지 못했다. 아이들이 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던 나의 불찰이다.


  이 카페는 서울의 대학가에 위치한다. 이용객들이 대학생일 가능성이 높다. 이 곳의 직원은 혼자 고군분투하며 문제를 푸는 중년의 아줌마를 몇 번이나 만나봤을까? 이 아줌마가 아까 자물쇠 설명할 때 딴생각하고 있었다는 걸 알고는 있을까? 이미 수많은 질문을 하면서 한없이 자아가 작아져 당당하게 말도 못하는 나는 이번엔 자물쇠 푸는 방식이 알고 싶었다. 그는 내 말의 의도를 눈치채지 못하고 문제의 힌트만 알려줬다. 입장하기 전 분명히 설명했고, 방탈출 카페를 찾는 손님들은 당연히 알만한 보편적인 것을 이 아줌마가 모른다는 걸, 그는 몰랐다.


  이곳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어느 부분이 이해가 안 가는지 다시 말씀해 주세요’였다. 친절하게도 그는 한 시간 내내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질문에 대답을 해줬다. 최근 들어 누군가와 가장 오래 통화한 경험이었다. 평일 오후라 다른 방이 비어 있어 다행이었다.


  마지막 방문을 열지 못한 채 우리의 체험은 끝이 났다. 땀나는 하루였다. 밖으로 나와 대학생처럼 보이는 어린 직원의 얼굴을 마주하니 창피함과 민망함이 쓰나미처럼 몰려왔다.  평일 업무량을 과다하게 제공해서 미안했다. 방 탈출을 넘어 얼른 집에 가고 싶었다. 이 화끈거림을 식혀 줄 시원한 아이스커피가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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